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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Nov 14. 2020

그녀의 속마음

17화

감옥에서  갇힌 채  며칠을 보냈다.   그곳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빛도  어둠도,  소리도  냄새도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심연같은 곳이었다.  나는 감옥 바닥에 주저 앉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아니, 뭔 가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승이 나타나 감옥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거라.”

스승은 발로 툭 건드려 나를 깨웠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오거라.  석방이다.”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스승이 말하는 석방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봤던 것 같다.  지은 죄가 있으니 완전히 자유로운 석방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지금의 석방은 소멸을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소멸된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지만 공허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내가 존재했었다 는 흔적 하나 남겨둘 것이 없다는 게 서글펐다. 그러나 스승이 감옥 문을 열어 젖혔고 새하얀 빛이 나를 향해 쏟아졌을 때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옥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맞닥뜨려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 비틀 걸어 나왔다。


스승은 내 어깨를 끌어안고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 결국 월하향이 너를 살려 냈구나.”

그 말에 놀란 내가 스승을 올려다 보자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박진한、 월하향이 너를 살려 내려고 영패 100개를 지불했다고 들었다.  저승에서 영패 백개를 다른 영혼을 위해 선뜻 내주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어.   너는 그 고마움을 잊지 말고  앞으로는 영패 백개보다  가치 있는 영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월하향이 나를 살려준 것이다.  그제야 스승의 등 뒤에 서 있는 월하향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여신 처럼 빛나고 있었다.  순간  여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 내려가 혼자 사는 외할머니를 몇 번 만난적이 있었지만 외할머니는 어머니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눈물부터 흘렸다.

“그렇게 아픈 줄 몰랐지.  가엾은 것. ”

외할머니가 어머니 사진을 보여준 일도 있다.  사진 속 어머니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중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너무도 앳되어서 아무리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해도 어머니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내 기억 속 어머니가 있어야 할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월하향을 바라보며 나는 어머니가 있었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었다.  


월하향이 나를 향해 다가왔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예전부터 그녀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다르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행복했다.

“박진한. 또 그런 짓 하면 안된다. 너 때문에 가진 영패를 다 써버렸어.”

월하향은 인사 대신 말하고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있으려니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편안하면서도 심장 어딘가 가 간질거린다.

“고맙다, 월하향.”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 알고 있겠지?  너는 영패 백개만큼 나에게 빚을 졌으니 꼭 갚아야 할 것이야.  기억해 두거라.”

월하향은 평소와 다름없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걱정마, 내가 너를 지켜줄 테니까.  네가 나를 살려준 것처럼 나도 너를 위해 뭐든 다 바칠 것이다.”

내 말에 월하향은 이마를 찌푸리며 대꾸했다.

“남자의 말은 믿지 않는다. 팔랑이는 나뭇잎 보다 가벼운 것이 남자의 약속이더라.”

“나는 다른 남자들 하고는 달라.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꼭 지킨다.”

“과연 그럴까?”

월하향이 되묻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당장이라도 내가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던 스승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월하향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  네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승에서는 시간이 2년이나 지났어.  그동안 네 동생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지.  얼마 전에 네 동생이  기자회견을 열고  곡을 뺏긴 것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제이피의 악행을 모두 폭로했으니 곧 뺏긴 곡을 되찾을 것이다.”

“기자회견을 말입니까?  그건 유명한 사람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정한이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월하향을 돌아보았다.

“돈에는 돈,  권력에는 권력,  도둑에게는 큰 도둑으로 대적하면 된다.  세상에서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지.  그보다  박진한, ”

월하향은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머금고  내 손을 가볍게 잡아 당긴다.  그 몸짓이 나비처럼 우아했다.

“응?”

“감옥에서 고생했으니 조용한 곳에서 잠시 쉬다 오는 게 어떠냐?”




월하향에게 끌려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온통 새하얀 세상이다.  한동안 내린 눈이 고풍스러운 건물을 순백으로 덮었다.  아직도 펑펑 내리는 눈이 쌓인 바닥에는 새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밤 새도록 내린 눈이 아직 그치지 않았구나.  이렇게 눈 오는 날, 사람이 없는 이런 곳이 참 좋더구나.”

사람은 없어도 영혼들은 많다.  영혼이라 겉옷도 없이 소복 소복 쌓이는 눈을 아무리  맞아도 춥지 않다.  덕분에 눈 속을 서성이는 영혼들은 나들이라도 온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월하향의 손을 꼭 잡고 고궁 뜰을 천천히 걸었다.  그 곳에는 하얀 평화만 가득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큰 벌을 받게 되는 건가?”

내가 묻자 월하향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벌은 면제 되었고 곧 다른 부서로 발령 받게 될 거야.  인간 세상에 관여하려던 간큰 영혼에게 걸맞는 직업이 생기겠지.  그때에도 독하게 칼을 휘둘러 보거라.”

“나쁜 놈에게 칼을 휘둘렀던 건 후회하지 않는다.”

내 말에 월하향은 피식 웃었다.  허세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야, 조심해!”

그때 들린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  예쁘장한 여성이 폴짝 폴짝 뛰어온다.  새하얀 눈밭에 부츠 자국이 콩콩 찍혔다.  그녀는 저 만큼 앞서가다 돌아본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오빠!  빨리와요!”

여성 뒤를 따르는 남자가 발걸음을 빨리한다.  털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장갑 낀 손으로 모자에 내린 눈을 툭툭 털었다.  남자는 동생 정한이었다. 정한은 여성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런, 데이트 하는 중인 모양인데.”

“네 동생이지? 박 정한이라고 했었나?”

“응.  저 아가씨도 예쁜걸.  그런데 어디서 봤더라?  많이 본 얼굴인데.”

“저 여자애 이름은 ‘하나’라고 한다.  기억나니?  네가 죽을 때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말하던 그 아이 말이다.”

“아, 그렇구나.”

동생과 함께 내 납골당에 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된 모양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기획사를 설립했고 딸을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시켜 주었어.  네 동생은 저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고 저 아가씨의 아버지가 새로 만든 회사에 취직했어.  그리고 그 회사에서 네 동생이 곡을 되찾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월하향이 설명해 주었다.

“짜식, 예쁜 여자친구와  직장, 게다가 든든한 후원자까지 한꺼번에 얻었구나.  부러운걸.  앞으로는  꽃길만 걷겠구나.  잘 됐어.”

“그래.  네 동생은 행복해질 것이야.  돈과 권력, 사랑, 명예.  세속적인 행복은 다 누리게 되겠지.  조만간 행복의 정점에 오르겠지.”

“고마워,  월하향.  이 모든 것이 네 덕분이야.”

내 말에 월하향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잊지 말아라.”



기숙사로 돌아오자 앨런이 달려 나왔다.  그는 내가 소멸된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얼마만에 돌아온 거지?”

“두 달 하고 이틀 더 지났어.”

두 달이나 지났다니.  놀라는 내게 앨런은

“갑자기 네가 사라졌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네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했다.  이어

“덩치 큰 선임님은 환생하셨대.  나도 도서관 부서에서 승진해서 지금은 식신 귀신 부서에 있어.”

하고 말을 이었다.

“식신 부서?  거기선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사람들이 식욕을 느껴서 마구 먹게 하는 거지.  하루 종일 다이어트 하면서 식욕을 잘 참다가  밤중에 결국 폭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 있지? 우리 부서원들이 부추겨서 결국 무너지는 거야.  아무 음식이나 마구 퍼먹고 나중에는 괴로워 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  일은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는게 너무 괴로워. 솔직히 내 적성에는 영 맞지 않아.  너도 새로운 부서로 발령 받았다며?  그 쪽은 어때?”

앨런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모르겠어.  새로 발령 받은 부서가 뭔지도 모르는걸.”

내 말에 앨런은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펼쳐 보였다.

“박진한,  너는 ‘저주 전담반’으로  발령이 났구나.  여기를 봐.  첫 출근 날짜는… 내일이야.”

“저주 전담반?  그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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