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동안 말이 없던 정한은 휴대폰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전화였을까. 반가운 듯 휴대폰을 움켜쥔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숨 고르기를 하고서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정한씨! 김외중 변호삽니다. 저쪽 변호사와 연락이 됐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제이피 측에서는 일이 조용히 해결되기를 바란답니다. 적절한 선에서 합의하고 싶다는 군요.”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합의요? 제 곡을 훔쳐가서 뻔뻔하게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도둑놈하고 합의하란 말입니까? 제 곡을 돌려받고 그 놈은 죄값을 받게 할 겁니다. 뮤지션인척 하는 제이피라는 놈 실체를 낱낱이 까발릴 겁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합의는 없습니다.”
“저야 박정한씨 편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알려드리는데 이런 경우에는 합의도 나쁘지 않아요. 소송하면 절차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 끝까지 간다고 해도 꼭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변호사의 물음에 정한은 멈칫하는 눈치였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자신의 능력을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합의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변호사님에게 가지도 않았습니다. 법대로 하려고 간겁니다. 처음부터 제 곡이었고 한 번도 그 사람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내 것을 돌려받는데 승소할 보장이 없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법이란게 생각하고 달라요. 증거도 있어야 되고 증인도 찾아야 되고 절차도 복잡하지요. 그 곡 말입니다. 이번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상위권에 뽑혔다면서요?”
“그 일로 제이피가 실검에 떴거든요. 그 덕에 제이피가 제 곡을 가져갔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제이피라는 작자, 유명한 프로듀서라기에 제 곡을 한번 봐달라고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상업성이 없다며 거절하더니 오디션 프로그램에 버젓이 자기 이름을 걸고 나왔더라구요.”
“그 말씀은 제이피가 박정한씨 곡으로 상도 타고 광고도 찍지 않았더라면 여태껏 그 곡은 서랍속 어딘가에 들어있었을 거란 가정도 가능한 거 아닐까요?”
“서랍에 넣어놓든, 쓰레기통에 버리든 그 곡은 제 작품입니다. 제이피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제 말씀은 제이피라는 사연 많은 가수가 이 곡으로 대회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 곡을 통해 어떤 이익도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밝히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돈이 남아돌고 시간도 충분해서 명예만 지켜도 먹고 살만 하다 하면 계속 진행하시는 거고,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고려해 보시란 말씀이지요.”
정한은 잠시 대답이 없다. 꾹 다문 입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니 영 마뜩찮은 모양이다. 변호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순서가 좀 틀렸지만 이 곡은 합의금 받고 제이피한테 팔았다 생각하시고 다음곡을 제대로 잘 써 보세요. 이번 곡보다 더 좋은 걸로. 곡 쓰는 사람들은 뚝딱 뚝딱 여러 개 쉽게 만들던데요. 박정한씨도 그정도 능력은 되지 않습니까?”
“제가 싫다면요? 이 곡을 끝끝내 되찾아 오겠다면.”
“글쎄, 그게 어려울 거란 말입니다. 변호사도 땅파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하자면 경비 꽤나 들텐데 그게 가능하시겠습니까?”
“제가 만든 곡은 제 자존심입니다.”
정한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리고 그 모양을 보고 있는 내 기분도 한 없이 구겨졌다. 씁쓸함이 치밀어 올랐다.
‘세상은 그런 것이었지.’
동생이 만들어낸 작품인데도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심지어 그 곡으로 상을 탔고 유명해 졌다. 그럼에도 동생은 당연한 자신의 것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비용과 시간,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뎌야만 한다. 가난한 자들은 빼앗기고 짓밟히고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살아있을때 나도 그랬다. 멀쩡한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해 전전긍긍했다. 어정쩡하고 흐릿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냈다. 그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연명했었다. 뚜렷한 내 것도, 속한 영역도, 사람도 없었다. 통화를 끝낸 정한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양 어깨가 애처롭게 축 처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눈을 떴을때는 이미 그 곳에 도착한 후였다.
한 낮이지만 여름 답지 않게 햇살이 약하다. 하늘에 가득 낀 구름이 태양을 반쯤 가린 덕분이었다. 낯선 도시, 큰길앞 사거리 횡단 보도는 한 줄로 늘어선 자동차로 길이 비좁아 보인다. 아직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아래 그놈이 있었다. 검은 야구모자를 눈까지 푹 눌러 쓰고 역시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 아래를 가렸지만 야구모자 밑으로 빠져나온 선명한 금발 머리와 독특한 얼굴선은 감출 수 없다. 그놈 바로 옆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항상 지니고 다니던 연습용 장검을 빼들었다.
“이 나쁜 놈아!”
놈의 어깨를 칼로 내리쳤다. 그는 움찔 하며 뒤를 돌아본다. 영혼인 나를 볼 수 없기에 등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아프냐?”
놈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싶어 이번에는 내가 흥분했다. 숨을 모으고 기합을 넣었다.
“제이피! 이 도둑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휘둘렀다. 몇 달이나 내 몸의 일부분이 되어 휘두르던 장검은 정확히 놈의 등을 가격했다.
“아!”
놈은 고통의 신음소리를 낸다. . 맞은 곳이 등이라 손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모르게 두들겨 맞으니까 기분이 어떠냐? 네가 내 동생에게 한 짓 만큼 갚아줄 테다.”
이번에는 몸을 날려 하늘로 솟구쳤다. 장검이 그의 다른 쪽 어깨를 내리쳤다. 제이피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그 바람에 곁에서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년 여인 쪽으로 넘어질 뻔 했다.
“괜찮으세요?”
여인이 제이피에게 묻자 그는 아픈 어깨를 만지면서도 어색한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래? 정말 괜찮은 건지 보자. 이번에는 더 큰 일격을 준비했다. 가뿐히 날아올라 신호등 위에 올라섰다가 그놈을 향해 뛰어 내렸다. 휘두르는 장검에서 휘익 하고 바람소리가 울렸다. 제대로 맞았다. 그놈은 서 있던 자리에서 튕겨져 나가 바로 앞을 달리던 승용차에 부딪혀 아스팔트 위에 뒹굴었다. 녀석 바로 옆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네 이놈!”
바람이 두 조각으로 나뉘는가 했더니 벽력 같은 소리가 머리위에서 들려왔다. 단단한 손이 제이피를 향해 한 번 더 휘두르려던 칼을 막아섰다.
“꿇어라.”
스승이었다. 내가 이 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나타난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스승님! 저는 이 놈을 가만 안 둘겁니다. 이번만 눈 감아 주십시오.”
“가만 안 두다니. 어떻게 할 셈이냐?”
“제 동생이 당한 고통만큼, 아니 그 두배, 세배, 아니 삼백배 만큼 돌려줄 것입니다.”
내 말에 스승은 피식 웃었다.
“삼백배는 무슨 삼백배. 이 애송이 놈아. 저승에 있는 귀신이 이승 사람을 건드리면 그 죄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저놈 몇 대 패준 후에 네가 겪을 고생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럼 억울하게 당한 제 동생은, 아니 억울한 영혼들은 그 한을 어디서 풉니까? 나쁜 짓 하고 죽은 놈들은 그 죄를 어디서 받습니까? 이렇게 불합리한 세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에게 끌려 가면서도 나는 발버둥을 치고 고래 고래 악을 썼다. 억울함으로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졌다.
“조용히 좀 해라. 시끄러워서 귀가 먹먹하구나.”
스승은 나를 가볍게 끌고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이 사는 곳을 벗어났다. 사막처럼 삭막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습지와 발이 푹푹 들어가는 늪을 지나 달이 검게 변해가는 바다를 지나 도착한 곳은 커다란 철창이었다.
“들어가서 반성하고 있거라. 나에게 배운 검술을 네 사사로운 복수에 사용한 점, 이승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해를 끼친 점 모두 저승에서는 큰 죄다. 참을성 없이 복수하겠다고 설치는 너 같은 놈이 저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변명도 쓸데 없다.”
(저승 감옥 안)
철창 안에 갇혀서도 한참을 버둥거렸다. 몇 번이나 철창을 뚫고 뛰쳐 나오려 발길질을 했다. 내 몸이 철창에 닿을 때 마다 엄청난 힘으로 밀려나 땅에 뒹굴었다.
“철창에 부딪히면 몸 안에 내상이 생긴다. 어리석은 짓은 그만둬라.”
스승의 말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날뛰다 결국 지쳐서 바닥에 쓰러진채 기진해서 잠이 들었다. 내 몸이 뚝뚝 땅속으로 꺼지는 꿈을 꾸다 수런거리는 말 소리에 잠이 깼다.
“일단 감옥에 넣어 뒀으니 시간은 벌었다. 소멸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 방법을 찾아 봐야지.”
차분한 목소리는 스승님의 것이었다.
“절대 소멸시켜서는 안돼. 내가 최선을 다해 막아낼 것이야.”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월하향이었다.
“소멸 명령이 내려오면 우리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다. 네가 저 녀석에게 공들인 것은 알고 있지만 어쩌겠느냐. 아깝지만 버리는 수 밖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승의 인간에게 해코지 하면 안된다는 걸 미리 알려줬어야했는데. 얌전해 보이길래 내가 깜박 잊었지 뭐야. 부주의한 내 탓이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서로 닮아간다고 하더니 너도 인간을 두들겨 패주고 감옥에 온 적이 있었지?”
“그때는 내 전생의 원수를 만났으니 그만 이성을 잃은 탓이었어. 여섯살 밖에 안된 친 딸을 기생집에 팔아먹은 아버지였다. 싫다고 우는 나를 광에 가둬두고 사흘이나 물 한모금 주지 않았지. 나를 기생집에 넘기고 돈을 받아 노름판으로 달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피 섞인 아버지라는 게 끔찍할 만큼 잔인한 인간이었어.”
“그래도 이승의 인간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너의 전생 아버지도 다시 태어난 지금은 잘 살고 있다지? 너처럼 예쁜 딸도 있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들었어. 그때 네가 화풀이 조금 하고 나서 고생한 걸 기억해 봐. 감옥에 갇혀 며칠이나 있었지?”
“감옥에서 나오려고 영패 오십개나 썼던 건 기억나는구나.”
월하향은 말을 멈추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허리를 굽혀 내 쪽을 들여다 본다.내가 정신이 든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쓰러진 채 눈만 뜨고 있었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내 두 눈과 그녀의 검고 차가운 눈빛이 만났다.
“박진한. 괜찮은거냐?”
월하향이 속삭였다.
“응.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다시 그놈을 만나면 또 두들겨 패 줄것이다. 내 동생이 당한 것 보다 몇 배로 되갚아 줄 거야. 소멸되는 것 따위는 하나도 겁나지 않아.”
내가 으르렁 거리는 모습을 본 그녀는 빙긋 웃었다.
“내 별명이 왜 독버섯인줄 아느냐?”
“글쎄.”
“절대 나 혼자는 죽지 않기 때문이야. 나를 먹으려는 자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너도 독버섯이 되거라. 너를 건드리는 자, 괴롭히는 자는 네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거라. 그것도 능력이고 재능이다. 나는 네 지금 눈빛이 마음에 든다. 예전 순둥이때 보다 훨씬 쓸모 있겠어.”
스승도 월하향 곁으로 다가왔다. 쓰러진 나를 잠시 응시하던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 철딱서니 없이 멋있어 보인다며 저승사자 하겠다고 할 때 말릴 걸 그랬구나.”
탄식하듯 말하는 스승 곁에서 월하향만은 눈빛을 반짝이며 힘주어 말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꼭 살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