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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Nov 14. 2020

영지 이야기

19화

다음 장면은 어둠속에서 시작되었다. ‘탁탁탁’ 가벼운 발 소리가 바로 앞에서멈추더니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릭 하며 현관 문이 열리고 현관에 불이 들어온다.  영지다.  직장에서 퇴근하는 모양으로 정장 차림에 핸드백을 어깨에 맸다.  나는 불빛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본다.  낯선 원룸 오피스텔 안이었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식탁 겸 책상 하나, 화장대 뿐인 오피스텔 안은 썰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무슨 놈의 회사가 맨날 야근에 새벽 출근이야?”

영지는 어머니와 통화중이었다.

“일이 많아져서 그래요.  아버지는?  별일 없으시죠?”

박스를 현관 안쪽에 내려놓으며 영지가 대답했다.  전 장면 보다 훨씬 핼쑥해 진 얼굴에는 핏기가 없다.

“아버지야 맨날 그러시지.  우린 네가 걱정돼.  집에서 다닐 때야 아침도 챙겨주고 반찬도 내가 해줬지만 직장 다니랴 밥 챙겨 먹으랴 얼마나 고달프겠니. 얘!  네가 좋아하는 명이나물 좀 갖다 줄까?  너네 집 주소가 어디랬지?”

영지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엄마!  회사에서 점심도 주고  저녁에는 회의 때문에 먹고 들어올 때가 많아요.  이사 올 때 주신 반찬 냉장고에 그대로 있어요.  저 사는 데는 오지 말아요.  주소도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걱정 말고 주무세요.”

“알았어.  네가 고집을 부리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어쨌든 잘 지내야 된다.”

어머니의 말에 영지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엄마, 당뇨는 약 제때 잊지 말고 챙겨 드셔야 한대요.  아셨죠?”

“응!  그래!  알았어.  너도 밥 잘 챙겨 먹고.  알겠지?”

통화를 끝낸 영지는 한동안  현관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혼잣말을 했다.

“엄마, 나랑 살면 엄마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현관에 켜졌던 센서 등 불이 꺼졌다가 영지가 신발을 벗자 다시 켜졌다.  영지의 신발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정장 원피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 차림이다.  순간 짐작 가는 것이 있기는 하다.  방금 전 장면에서 검은 그림자에게 쫓기던 그녀는 어쩌면 그 일 이후부터 퇴근길에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은 것이 아닐까?  언제든 뛰어서 도망칠 수 있도록.

영지는 지친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섰다.  그녀가 조명을 켜자 어둡던 집 안이 환 해졌다.  그와 동시에 영지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핸드백을 내려 놓을 사이도 없이 그녀는 풀썩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멈춘 곳으로 나도 고개를 돌렸다.  화장대에 걸린 거울이었다.  그 곳에 빨간색 립스틱으로 써 넣은 글씨가 섬뜩하게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영지, 사랑해.  피곤하지? 와서 밥 먹어.”





“영지씨, 이렇게 만나러 올 줄 알았어.”

이번에는 다른 장면이었다. 영지는 낯선 남자와 마주 서 있었다. 한밤중 어두운 도시 구석에서 흔하디 흔한 건물 옥상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아까 봤던 빗속의 그 사람이 분명하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도 징그러운 지네처럼 흉물스럽게 내 귓가에 감겨왔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영지가 따져 물었다.

“영지씨, 항상 말하지만 당신은 나의 여신이야. 우리 저번에 만났을 때 기억 나? 분명히 당신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잖아. 우리는 운명이 지어진 짝이야.”

“우리가 언제 만났다고 그러세요? 저는 댁 같은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고요.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집에는 왜 자꾸 찾아오세요?”

“그러게 누가 소개팅을 하래? 그놈하고 잘되는 꼴을 내가 볼 것 같아? 이렇게 내가 살아있는데! 영지씨가 어떻게 한 눈을 팔 수 있어? 우리 결혼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자, 응? 영지씨.  우리는 운명이야.”

남자가 영지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 안는다.

“이러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도대체!!”

영지가 비명을 지르고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왜 그래? 영지씨, 좋으면서 앙탈은. 내가 살아있는 한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 와.”

영지는 절규했다.

“7년이라고요, 7년! 그렇게 나를 따라다니고 싶어요? 언제까지 그럴 건가요? 살아있는 동안은 벗어날 수 없다면 죽으면 되겠네. 차라리 나를 죽여요!”

영지는 남자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멈춘 곳은 옥상 난간 위였다.

“영지씨, 장난하지 말고 내려와서 얘기하자. 우리 얘기 좀 하자. 응?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강하게 나가던 남자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는 양 손을 벌리고  영지를 받아 안으려는 듯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그녀는 이제 아슬아슬 한 난간 위에 서 있었다.

“이렇게 끝낼 수만 있다면…….”

영지가 말했다.

“영지씨!  이러지 말아.”

남자가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영지는 눈을 감았다.  번지점프라도 하는 사람처럼 양 손을 날개처럼 펼쳤다.

“나는 당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를 연습했어.  등산을 하고 암벽 등반을 했어.  당신이 쫓아오면 도망칠 만한 체력을 길러야 겠다고 생각했어.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어.”

영지는 선언하듯 말했다.  방금까지 절규하던 목소리는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영지씨…….  내려와.  우리 이야기 하자.”

영지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밖에 끝낼 수 없다는 게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당신이라는 인간에게서 벗어 날 수 있다면.  이 방법 밖에 없다면.  나는 기꺼이.”

영지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대신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영지가 서 있던 난간을 향해 달려가 그녀가 떨어진 곳을 잠시 응시했다.  영지가 추락한 곳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명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옥상까지 들려왔다. 남자가 그녀를 따라 뛰어내릴까 순간 걱정스러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허둥지둥 옥상을 벗어났다. 15층짜리 건물이고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내려가다 인기척이 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늘에 숨는다.  자신 때문에 영지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은 까맣게 잊은 듯,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조심하는 것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 것도 CCTV에 녹화될까 조심하는 게 아닐까에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자가 1층에 도착했을 때 구급차가  도착했다.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에서 빠져 나온 남자는  구급차 뒤쪽을 돌아 한적한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기분이 어떠냐?”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끔찍한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착잡한 기분으로 정신을 차린 곳은 백색의 공간이다.  기억의 문을 통해 들어왔던 하얀 방이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된 종이 뭉치를 양 손에 들고 서 있고  나에게 송충이 눈썹을 꿈틀대며 물어본 것은 장비였다.

“열 받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저 놈이 내 아내에게 같은 짓을 했더라면 뼈 마디 마디를 톡톡 분지른 다음에 사지를 쭉쭉 찢어 놓았을 게다.  피해 당사자가 네 아내라니, 너는 더 속상하겠구나.”

장비는 말 끝에 혀를 찼다.

“영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내 목소리가 사막 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나왔다.  그래서 였구나.  영지가 결혼식을 하고도 나를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던, 나와 헤어질 때 쓸쓸히 바라보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장비는 대답 없이 내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를 한 장 뒤로 넘겨준다.

“하영지를 스토킹 하던 그 놈은 아직 이승에서 살아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와 아들도 한 명 있지.  이것이 그 놈의 사진이고 여기가 그 놈이 사는 곳이다.”

장비가 짚어준 사진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빙긋 웃고 있다.  단정하게 적당히 자른 머리스타일에 적당히 섞인 흰머리, 맘 좋은 아저씨처럼 적당히 튀어나온 아랫배와 살집 오른 얼굴, 거기에 은테 안경을 썼다.  나는 그 사진을 눈에 집어넣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하영지가 너에게 부탁한 내용이 여기 적혀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읽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하겠다.  박진한!  너는 하영지의 한을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느냐?”



퇴근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토록 집요하던 스토커가 너무도 평범하게 생겨서 놀랐고 아직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도대체 세상에 정의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의구심에 가슴 한 구석이 부글거렸다.  자신을 죽게 했던  스토커가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는 것을 본 영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더 울컥해진다.  답답한 마음에 기숙사 방에 들어가지 않고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진한,  저녁에 한잔 어때?”

나를 발견한 앨런이 말을 걸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미안해.  지금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술은 나중에 하자.”

“그래? 그럼 나도 다음에 마셔야 겠는데…….”

앨런이 아쉬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깜박 잊고 무릎위에 두었던 종이 뭉치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줍기 시작했다.  한 장 한장 주워올릴 때 마다 가느다란 영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한 장을 주워 든 내 눈에 그녀가 꾹꾹 눌러 적어넣은 한 줄이 들어왔다.

(이 부분 임팩트 있게! )

“나를 죽게 했던 그 사람이 제가 당했던 고통과  공포를 두 배로 느끼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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