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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Nov 14. 2020

영지 이야기 3

21화

놈은 느지막이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식탁에 앉아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은 그가 불쑥 생각난 듯 말했다.

“나 오늘 저녁에 친구들 이랑 노는 거 알지?”

“네?  아네…….”

“강민이네 가게에서 만나서 고기 먹고 술 먹고 밤새도록 놀 테니까 차 두고 나갈거야.  너 집에서 할 일없으면 세차 좀 해놓든지.  저번처럼 기스내 놓지 말고 살살, 깨끗하게 뽀득 뽀득 좀 닦아둬.  운전석 청소도 해놓고.”

“네,  네.”

그의 어린 아들이 방에서 나온다.  유치원 가는 모양으로 노란색 가방을 맸다.  밥 먹고 있는 놈을 발견하자 아이는 얼른 현관으로 달려간다.  놈이 불러세울까봐 겁 먹은 눈치였다.

“야! 너 어디가냐? 저 새끼는 아버지를 보고 인사도 안하고.  친자확인을 해보든지 해야지.  어쩐지 예쁜 구석이 없단 말이야.”

놈의 말에 그의 아내가 얼른 아이 뒤를 따라가며 말한다.

“주빈이 등원 시키고 올게요.”

놈은 대답도 없이 밥을 우겨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휘파람을 부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옷을 갈아입다가 서랍장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다.

그새 그의 아내가 돌아왔다.

“내일 몇 시쯤 오세요?”

조심스레 묻는 데  그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거 알려 들지 말고 먼지나 좀 닦아.  서랍장에 먼지 낀거 봤어?  딱 봐도 두 달은 안 닦았는데.  너는 집에서  뭐 하는 인간이냐?  할 줄 아는 건 밥 먹고 돈 쓰는 일 밖에 없지?”

맘대로 패악은 부렸지만 새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볍다. 놈은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 버스를 탔다.  


(시내 버스 안)


시내버스 안은 은근히 붐볐다.  빈 자리가 없어서 놈은 서서 간다.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웹툰을 보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는지 히죽히죽 웃기도 한다.  

“웃는다 이거지?  맘껏 웃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될테니까.”

놈이 웃는 것이 보기 싫어서 나는 빨리 복수를 진행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놈 엿 먹이기는 쉽다.   놈의 휴대폰 버튼을 다다다 하고 몇 백번 눌러주면 끝이다. 십초도 안 걸린다.  내 손이 닿자  그의 휴대폰에서  사진 찍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 뿐 아니다.  간간히 플래쉬도 터진다.

“꺅,  어머  이 아저씨 좀 봐.”

놈이 서 있는 자리 앞에 앉아 있던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순간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의 눈이  그들을 향해 집중된다.

“성폭행 범이에요!  저를 막 만져요.  치마 입은 거 막 찍어요.  도와주세요.”

여성이 다급한 소리로 외치자 주위 남성들이 나섰다.

“야!  너!  핸드폰 내놔!  어딜 숨겨?  증거 확보합시다!”

놈은 정말 황당한 표정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 파악에 애쓰는 모양이다.

“저요?  제가 뭘 어쨌다고…….”

“네가 이 아가씨 사진 찍었잖아.  아까 다리도 만지고.  히죽히죽 웃어가면서.”

“누가 누구를 만져요?  제가요? 저 아닙니다.  안했어요.”

놈의 말에 사람들이 더 발끈한다.

“저놈 진짜 나쁜 놈이네.  우리가 다 봤는데  오리발이야?  반성의 기미도 없고.이거 안되겠습니다.  핸드폰 뺏고,  저기 기사님!  경찰서로 갑시다.  현행범으로 우리가 잡아다 줍시다.”

“저는 안 했어요.  의심스러우면 핸드폰 보세요.”

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근처에 얌전히 서 있던 남성이 놈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여기 보세요.  여자 다리 사진만 수 백장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소리를 더 높였다.  물론 그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니 놈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이다.

“변태 상습범이구만.  한 두번 한 솜씨가 아닌데.”

“정말 아니에요.  아니, 얌전히 버스 타고 가는 사람한테 왜 그럽니까?  휴대폰에서 웹툰  보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버스 승객들이 휴대폰을 들고  놈의 얼굴을 마구 찍어댔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피해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 까지  그의 목소리며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SNS에  올랐다.

“아주 잘 걸렸다.  너 같은 놈 때문에  평범한 남자들도 싸잡아 욕 먹는거 아니냐?  저런 놈들은 콩밥을 먹여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촬영하는 동영상에 멘트까지 넣으며 흥분했다.  




결국 놈은 경찰에 인계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수 백장의 사진도 함께.  경찰 앞에 앉아 울고 있는 피해 여성 옆에서  놈도 울고 있었다.  그는 억울한지  가슴을 제 주먹으로 쳐댔다.

“진짜 억울해요. 저는요, 휴대폰 사진 같은 건 안찍는단 말입니다.  그리고 찍는다 쳐요.  저 여자를 왜 찍어요?  경찰 님들도 눈이 있으면 보십쇼.  나도 남자로서 자존심이 있고  취향이라는게  있지,  머리 길고 치마 입으면 다 여자냔 말입니다.  너, 자꾸 울면서 사람 나쁜 놈 만들지 마. 다리통인지  뭔지 네건  갖다줘도 안 만진다. 그게 여자 다리냐?”

놈이 입에 거품을 물자 경찰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방금 한 말  녹음 됩니다.  성추행 혐의 추가요.  아저씨는 증거가 확실해서 아무리 거짓말 해도 못 빠져 나가요.  포기하고 조용히 좀 합시다.”

놈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영지씨?”

놈의 시선이 멈춘 곳에  내 시선도 멈췄다.  그 곳에는 영지가 서 있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에 긴 머리는 묶지 않고 풀어 내렸다.  창백한 얼굴만 아니라면  살아있는 사람처럼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눈빛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나도 영지와 다름 없는 귀신의 입장이지만 솔직히 그때는 영지가 무서웠다.  무표정한 그녀의 눈길과 마주칠 때 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사기꾼 귀신을 두들겨 팼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시무시한 힘 같은 것이 있었다.

영지와 눈이 마주친 놈이 돌 처럼 딱 굳었다. 안색도 귀신인 영지 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렸다. 그를 한동안 응시하던 영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듯 살짝,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빙긋 핏빛으로 웃었다.

“힉!”

놈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가더니 경찰서 바닥에 대자로 쭉 뻗었다.

“뭐냐, 저건?”

놈을 조사하던 경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절해 누워 있는 놈을 바라본다.  

“얌전히 앉아있던 인간이 왜 뒤로 넘어가냐?  누가 보면 내가 한 대 친 줄 알겠네. 배우해도 되겠네. ”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절한 놈을 앰뷸런스에 실어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려는 데 놈이 정신을 차렸다.  아까 까지만 해도 억울하다며 가슴을 두드리던 패기는 어디 가고 이번에는 무섭다며 벌벌 떨었다.

 “거기 경찰 아저씨!  귀…. 귀신요.  저기, 저……저기.  귀신이 나를 잡으러 왔어요.  저좀 살려주세요.  저좀요.”

“아주 골고루 하시네.  이것 보세요, 아저씨.  정신 나간 척 하면 안 잡아갈 것 같습니까?  쇼 그만 하시지.”

경찰들이 와아 하고 웃어버린다.  

그런데 순간 장면이 미묘하게 변했다.  장소는 아까와 같은 경찰서였지만  의자에 앉아 조사 받는 사람은 영지였다.  영지가 살아 있을 때라면 시간이 이십 여년 전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릴 때 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요.  사는게 사는게 아니에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너무나도 공포스러워요. 도와주세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던 영지를 경찰이 흘낏 쳐다본다.

“정말 그 남자 모르는 거 맞아요?  전 남친이나  동네 아는 사람 아닌거 맞지요?”

확인하듯 묻는다.  영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에요.  말도 한 적 없어요.”

“그러게,  미친 놈이네.  지나가다 한 번 눈만 마주쳐도  나 좋아하나  생각하는 망상가들이 있기는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그런 놈도 여자가 행동을 조신하게 하면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다 알지? 하는 의미로 ) 는 말입니다.  여자가 빌미를 줬으니까  남자가 행동하는 거다  뭐 그런 뜻이지요.”

경찰의 말에  옆에 있던 다른 경찰들도 킥킥 거린다.  말은 안했지만 모두가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도움을 청하러 온 피해자 영지를 오히려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애원하던 영지의 얼굴이 어느새 담담해 진다 했는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에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곧 장면은 현재로 바뀌었다. 영지가 앉아있던 의자에 지금은 그 놈이 앉아 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표현이 있다. 이번에는 화가 머리를 뚫고 올라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예전에는 그랬다지만  도움 청하러 간 경찰서에서 오히려 비난을 받았던 영지의 기분이 어땠을까  싶어 더더욱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있던 놈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겼다.  놈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앓는 소리를 했다.

“이 겁쟁이 비겁한 놈아!”

벌벌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놈을 보니 재미있는 장난이 떠오른다.  나는 돌풍처럼 방을 한 바퀴 돌며 창문에 걸린 블라인드를 흔들었다.

“약한 가족, 여자들이나 괴롭히는 찌질한 놈!”

그 바람에 벽에 붙어있던 작은 액자 그림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쿠.  저것 보세요. 귀신이 온 겁니다.  저를 데리러 왔을 겁니다.  영지씨라면……  저는 알아요.  그 여자가 왔을 겁니다.”

놈은 와들와들 떨며 중얼거린다.   놈 바로 곁에 영지가 서서 그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대고 뭔가를 속삭이고 있는 것을.  그녀의 속삭임은 너무 작아서 세 발짝 떨어져 서 있는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궁금해진 나는 영지와 놈이 자석처럼 딱 붙어 있는 그 곳으로 다가갔다.  영지와 거의 부딪힐 만큼 가까워진 후에야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기다려, 두 배로  갚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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