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해

몸과 자기통제

by 영인


― 몸을 관리한다는 이름의 심문


나는 몸을 돌본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몸을 심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왜 더 무거운지, 어제는 왜 참지 못했는지,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지 않은지. 거울 앞에서, 체중계 위에서, 식탁 앞에서 나는 늘 질문하는 쪽이었고, 몸은 대답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관리라는 말은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종종 처벌의 문법이 숨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통제를 미덕으로 배워왔다. 참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의 신호를 들을 때도 번역기를 거쳤다. 배고픔은 나약함으로, 피로는 게으름으로, 욕망은 실패로 번역되었다. 그 번역은 언제나 나에게 불리했다.
몸은 자주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 오늘은 덜 밀어붙여도 된다고, 오늘은 충분하다고. 대신 나는 숫자를 내밀었다. 칼로리, 시간, 횟수, 목표치. 몸이 사람의 언어로 말할 때마다, 나는 계산의 언어로 응답했다. 그 대화는 늘 어긋났다.
묵상 중에 문득 깨닫는다. 내가 통제하려 했던 것은 몸이 아니라 불안이었다는 것을. 무너질까 봐, 놓칠까 봐, 다시 돌아갈까 봐 나는 몸을 붙잡았다. 그러나 불안은 잠시 잠잠해졌을 뿐, 몸은 점점 나에게서 멀어졌다. 통제가 강해질수록 신뢰는 약해졌다.
나는 내 몸을 증거물처럼 다뤄왔다. 결과를 요구하고, 변화를 재촉하고, 설명을 강요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까지 이럴 건지. 몸은 그 심문 앞에서 침묵하거나, 때로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통증으로, 폭식으로, 무기력으로. 그때마다 나는 또다시 통제를 강화했다. 악순환이었다.
오늘은 질문을 바꿔본다. 왜 못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느냐로. 관리의 언어를 돌봄의 언어로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익숙한 채찍을 내려놓고, 느린 속도를 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습 없이는, 나는 계속 나 자신을 심문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몸에게 말해본다. 너는 결과가 아니라 관계라고.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동행이라고. 아직 서툴지만, 오늘은 덜 묻고 더 듣기로 한다. 덜 재단하고 더 기다리기로 한다. 몸을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집으로 받아들이면서.
완벽하지 않아도, 관리가 실패처럼 느껴져도, 나는 다시 선택한다. 심문을 멈추고 돌봄을 시작하는 쪽을. 이것이 지금의 내가 내 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사과이자, 가장 현실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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