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神)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헤르만 헤세
데미안
저자 헤르만 헤세
출판 민음사
발매 2000.12.20.
알 속에 들어있을 때는 그 알이 부화되기 전까지 안에 들어있는 생물의 정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알에 들어있는 생물은 알을 깨고 나오려 노력한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확한 생체 시계가 멈춘 지점에서 알 속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다.
병아리나 백조, 오리나 기러기의 세포 안에는 생체 시계가 있어 알을 깨고 나올 때를 맞춘다지만
인간은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오는 시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알 속에 숨겨진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할 때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헤세를 존경했던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능력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도 수 없이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깨어날 알 껍질을 가진 사람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을 다시 읽었어도 그랬다. 대체로.
최근에 다시 한번 읽을 기회를 가졌다. 솔직히 그 순간은 나에게 축복이었다.
사람들에게도 '알을 깨고 나올 시기'가 오는구나.
날개가 돋으려고 겨드랑이가 가려운 이상의 '날개'처럼
자신이 속한 이 세계가 딱딱하고 답답하고 재미없어질때.
그래서 견딜 수 없어질 때.
숨조차 쉴 수 없어질 때.
사람들은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구나.
알을 깨고 나왔을 때 처음 생기는 변화는 물론 '시야'에 관한 것이다.
조금만 보이던 빛, 자신만 비추던 공간에서 벗어나면
세상이란 이렇게도 크고 찬란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내가 보던 세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조그만 세상이 얼마나 조악한 곳이었는지.
그다음엔 지금 있는 세계에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까 봐 두려워진다.
그래서 견딜 수 없어진다. 알을 깨지 않을 수 없다.
아프고 살갗이 벗겨지고 주위에선 야단이 난다.
"얘, 너 미쳤니? 지금 이곳에서 넌 모든 걸 가졌어.
너무 욕심 내면 안돼. 그럼 불행해져."
그러나... 알을 깨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다.
이미 자라 버린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운명이다.
알은 세계다. 돌이켜 보면 깨어졌어야 할 세계.
날아올라야 했던 세계.
언제나 노른자와 흰자로만 살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새로 한 번쯤은.. 단 하루라도
살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알에서 나온 나는 잠시 햇빛 아래서 날개를 말린다.
날아갈 준비는 다 된 것인가?
운명의 무게도 더 이상 나를 막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