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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pr 22. 2020

04. 오페라 가르니에를 상상해

파리에서 만난 언니들




그녀가 불현듯 내 일상에 나타났을 때,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섣부르게 약속을 잡거나 밥 한번 먹자는 식의 빈말을 건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가까워질수록 서운함은 비대해지고, 잠시라도 멀어지면 속상할 게 분명하니까.     


그날은 꼬박 열 시간을 자고 사과 두 알을 먹었다. 더는 집에 있는 나를 자책하거나 한심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하면 내일도 이불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겨울잠은 모든 생명의 숙명이라며 거창한 위로를 건넸다.      


종일 자고 깨기를 반복했을 때 낯선 이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1구 오페라 근처 한식당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요즘은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스냅 촬영 일이 더 많다고 했다.  

    

상대에게 그 어떤 질문 없이 본인을 소개한다는 게 근사했다. 내 또래의 여자, 어쩌면 어제저녁 지하철에서 스쳤을지도 모르는 사람. 평소대로 라면 그녀의 SNS 계정에 ‘좋아요’만 몇 개 누르고 달아났겠지만, 나도 모르는 새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지금 사는 곳, 하는 일, 요즘 드는 잡다한 생각까지 전부 다. 하지만 순간의 반가움이 부담으로 번질까 두려웠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그녀는 친구와 함께 런던 여행을 떠났고, 나는 파리에 온 애인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서로의 일상을 지켜보던 중 그녀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소진 씨와 소진 씨 애인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요.”  

    

세 사람은 1880년대부터 140년 동안 세계 각국의 원두를 취급하고 있는 ‘Cafe Verlet’에서 만났다. 그곳의 나무로 된 메뉴판을 양손에 잡은 채 긴장했던 게 선명하다. 나는 카페 알롱제, 애인은 쇼콜라, 그녀는 카페오레 우리는 하얀 컵과 함께 나온 주전자를 들고 자신의 농도에 맞게 물을 부었다.     


나는 자꾸만 커피잔 안에 이미 식어버린 물을 부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곧잘 웃었는데 그건 소리의 입자를 흘려보내는 식의 미소가 아니었다. 말의 마디 사이에 선명한 느낌표가 찍혀 있었다. 상대방 이야기를 아무 편견 없이 한 줄로 길게 늘여 듣다가 마침내 점. 대화가 이어질 때 한눈팔지 않다가 다시 점. 내가 하는 무용한 말들이 마침내 그녀에게 안착하였을 때, 나는 영현 언니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그녀와 내가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학 생활을 했다는 것부터 파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 것, 백화점보다 생투앙 벼룩시장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전부 좋았다.      


우리는 오페라 가르니에로 갔다. 내가 일주일에 네 번, 오페라 역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풍경. 이 길이 나중에도 익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반듯이 걸었다. 나와 오페라 가르니에의 거리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점에서 우회전, 일본 식료품점을 지나 뉴욕 쿠키 가게를 지나 일본 라멘집 하나가 나오면 바로 건너편에 내가 일하는 한식당이 나왔다.     


파리에 오기 전에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면 다 보려고, 다 알려고 하지 말 것. 정성 없이 다가서면 무엇이든 내게서 달아날 테고, 헤아리지 않고 알려고 들면 마음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것이라 여겼다. 하나의 다짐은 미신이 되어 나를 번번이 통제했다. 지금까지 나는 출근길마다 보았던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


언젠가 나를 대신해 오페라 가르니에에 다녀온 애인이 말하길, 그곳의 대리석으로 된 층계를 오르다 보면 삶의 바깥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했다. 무엇보다 샤갈의 천장화는 색의 경계가 무색할 만큼 영혼을 빨아들이는 기운이 있어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보았다고 했다.      


애인이 홀로 목을 꺾은 채 사랑의 색을 올려다보았다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건물 내부에서 뿜어내는 화려함에 눈멀어 그동안 보았던 풍경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는 아직 때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한 파리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애인은 투명한 기타를 연주하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영현 언니는 이 모든 과정을 찬찬히 담았다. 우리의 사진에는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고 건축물이 주는 우직함과 정교함만이 남아 있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지나 꽃이 지고 흙먼지만 나뒹구는 튀일리 정원, 오르세 미술관 앞 자물쇠로 가득한 다리에서도 언니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자물쇠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사랑의 밀어로 가득했다. 끝내 해석할 수 없는 말들은 꼭 눈동자 같아서 색은 달라도 마음의 방향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영현 언니의 손이 점점 더 붉어지고 마침내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도 아릴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의 촬영은 끝났다.      


나는 곧장 한식당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두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라면 가게로 갔다. 추운 겨울, 라면 한 그릇 값으로 나와 애인의 모습을 담아준 영현 언니. 그녀는 내가 파리에 잠시 머물렀다는 걸 기억해주는 사람. 나와 애인이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과정을 지켜본 증인이었다.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털어놓으면 그 얘기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단 경험을 꺼내어 놓았다. 그 다정함에 내가 얼굴을 마구 비비면 가만히 등을 두드리는 사람.      


특히 언니의 검은 단발머리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마지막에 붙이곤 하는 주황색 하트 이모티콘 세 개가 좋았다. 주황은 빨강과 노랑 사이에서 너무 뜨겁지도 붕 떠 있지도 않다는 것 역시 그녀와 맞닿아 있었다. 자신을 애써 드러내지 않지만 한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 그건 사랑을,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언니의 파리는 나의 파리와 어디가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달랐을까. 우리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같은 장소를 그리워한다는 것. 그 마음이 일상을 버티는 순간이 될 때마다 언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파리에 가요, 그곳의 봄도 여름도 모두 만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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