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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r 19. 2020

03. 질투하지 말고 사랑할 것을

파리에서 만난  언니들




줄곧 J를 질투했다. 그 마음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면 애초에 나와는 성향이 맞지 않은 사람이라 여겼다. 한식당 아르바이트 첫 출근 날 그녀를 만났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 어딘가 모르게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글을 쓴다고 했다.     


파리에서 만난 유학생들은 대부분 미술 아니면 음악 전공자였다. 그 외에도 미학이나 건축 혹은 언어 공부를 위해 온 사람은 있었지만, 문학을 배우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가 글을 쓴다는 말에 자못 쓸쓸해졌다. 문학이 나와 그녀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자꾸만 틈을 만들려 했다.

    

한식당 근무 시간표가  달라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일은 없어졌다. 그녀는 내게 종종 메시지를 보내곤 했는데 혹 어려운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그 선한 마음이 나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학부 졸업 이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파리에 왔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는 프루스트 소설 제목도 아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한다며 떠났다. 나에게는 도피처와도 같은 파리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약의 지점이라는 사실. 여기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불어로 글을 배우고 쓴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알량한 자격지심은 나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가장 쉬운 낱말로 소박한 문장을 짓고 싶었지만 언제나 비슷한 외로움을 발견하면 잔뜩 웅크린 채 달아날 준비부터 했다. J를 향한 모호한 질투심은 아무런 실체 없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녀에게 힘들다고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센 강에서 부키니스트를 마주칠 때마다 J를 생각했다. 초록 가판대로 된 노천 서점의 주인들. 그들의 일터는 종로에서 LP판을 파는 아저씨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헌책은 물론 LP, 우표, 악보, 엽서까지 판매 물품 또한 다양하다.      


가만 들여다보면 가판대마다 책의 분야가 저마다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판매하는 책의 지식을 갖춘 준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파리시는 부키니스트 선발 과정에서 지원자가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췄는지 살핀다고 한다. 부키니스트가 되기 위해 길게는 7년까지도 기다릴 정도로 대기자가 많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신이 손수 고른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독서를 하는 주인. 그 뒤로는 센 강이 반짝이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도시에 생기를 더한다. 이곳을 J와 함께 걷는다면 평소 묻지 못했던 사소한 질문부터 캐리어에 책을 단 한 권만 넣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 지까지 물어봤을 것이다.      


어딜 가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만 써서는 생활의 곤궁함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녀는 근근이 아르바이트만 하는 나와 달리 학교에 가서 낯선 언어로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만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말의 속도가 빠르고 좀처럼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파리 물가가 서울과 비슷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관광을 할 때나 그렇지 막상 살아보면 끼니를 해결하는 일마저 사치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J에게는 삶을 물고 늘어지는 지독한 구석이 엿보였다. 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래도’라는 부사를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듯했다. 상대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되 언제나 자신이 세운 기준이 명확했고 수용범위까지 정해져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했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다가서기를 망설였던 걸지도 몰랐다.     


우리는 내가 파리를 떠나기 하루 전날 처음으로 둘이 만났다. 가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은 적은 있었지만, 단둘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게 파리는 10년 전에도 파리였고, 10년 후에도 파리일 거라고 했다. 그 말은 비자 기간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또다시 도망치듯 떠나는 내게 파리는 언제든 돌아와도 되는 곳이라는 말로 들렸다.


J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유학을 시작하기 몇 해 전에 파리 워킹홀리데이를 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파리 한인 민박에서 1년 동안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는데 별다른 임금을 받지도 못했고 파리에 와서도 가사 일만 도맡아 하느라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 않다고 했다. 이후 한국에서 출판사 근무를 하다가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다시 한번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 결정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내가 본 그녀의 지독한 구석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나를 대할 적마다 본인이 파리에 왔을 때보다 더 씩씩하게 생활하는 게 좋아 보였다고 했다. 우리가 서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 더 위태로운 마음으로 응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나와 그녀는 성향부터 사고하는 방식까지 전부 달랐다.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내게 보낸 메시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나눈 대화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서점이었다.     


그녀에게 얼마 전 서점에서 보았던 한강 소설 『흰』 영문판을 보여주고 여기서 일을 하기 위해서 매달 에세이를 한 편씩 제출해야 한다는 것과 일반 관광객도 하룻밤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혼자 있을 때 비로소 평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고 하자 J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없어서 안드레 애치먼 『그해, 여름』을 건넸다. 내가 파리에   유일하게 갖고  책이자 여기서 매달 마지막 날이면 읽은 작품이었다. 손때가 많이 묻었음은 물론 겉표지도 없고 군데군데 커피 자국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한국어로  책을   주고 싶었다. 우리는 헤어지는 방법을 몰라 나중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앞에서 보기로 했다.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겠지, 파리에 J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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