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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3년 후, 5년 후, 나는 자전거를 샀을까?”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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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색대문>을 봤다. 21년 정식개봉 때 이미 봤지만, 보자마자 반한 영화여서 재개봉 관람도 놓칠 수 없었다. 지난 방송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대만에 가고 싶어지게 만드는 구실을 모아두는 걸 좋아하니까. 책, 영화, 노래, 그림, 음식, 굿즈, 사람. 무엇이든. 그리고 21년도에 관람한 <남색대문>은 그런 구실을 모으게 만든, 그러니까 나에게 그런 구실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한 첫 건덕지였다.

이 일기를 쓰기 전, 내 블로그에 접속해 남색대문을 검색했다. 내게 이렇게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화라면 분명 어떤 기록이 남아 있을 거란 확신에서였다. 아주 짧은 감상이라도. 그런데 하나도 없었다. 계륜미, 진백림, 배급사 오드까지. 관련 키워드를 다 넣어도 검색 결과는 깨끗했다. 별 일도 아닌데 좀 허탈했다. 정확히는 머쓱한 기분. 그래서 궁금했다. 그때의 내 마음이 기억보다 산뜻했던 건지, 아님 그저 지금보다 더 단호했던 건지.

어떤 시절의 내가 궁금한데 도통 알 수 없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오히려 난 원하지 않아도 자꾸만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되는 기록을 아주 오랫동안 해오고 있었으니까. 언제든 내가 궁금해하기만 한다면 거의 모든 날들의 나를 (일부나마) 만날 수 있다고 여겼나 보다.

영화 속 청춘들은 이제 막 열일곱의 여름을 지나가는 중이다. 어느 방과후의 여름, 멍커로우는 생각한다. ‘3년 후, 5년 후,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땐 아마 나도 멍커로우의 미래를 이리저리 상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미래의 멍커로우가 그런 질문을 했던 자신의 열일곱을 기억할지 궁금해졌다. 꼭 스스로에게 답을 들려주면 좋겠다.

중요한 건 결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미래를 기다린 과거와 마주한 채- 미래로서의 지금을 잠시 다른 마음으로 대해보는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를 기다렸다.

살면서 내 미래가 기대되거나 궁금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일기를 쓰는 동안 자주,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지만은 줄곧 궁금했다. 지금 여기의 나는 이런데, 거기의 너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시간이 걸릴 뿐, 반드시 답이 돌아올 거란 생각을 하면 묘한 설렘이 일었다. 까닭없는 불안이나 실체 없는 걱정 같은 것들도 이내 잠잠해졌다. 20년 가까이 꾸준히 일기를 쓸 수 있었던 건, 매일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나간 나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가끔 너무 시시하고, 무료하고, 지루하고, 버겁고, 괜히 한 번씩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어떤 이야기라도 들려주길 기다리는, 지금보다 어린 모든 나들을 생각한다.

요즘 친구들과 흔하게 주고받는 말처럼, 잼얘 없어? 하고 물으면-

그곳의 나에겐 도무지 보이지 않는 미래겠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여기의 내가 썰을 풀어줄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이 영화를 두 번 보면 대만에 가는 것을 참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냥 일기를 더 열심히 써야겠단 다짐만 하게 됐네. 이제 일기는 끝나가고,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싶지만 난 별 수 없이 또 걷겠지. <남색대문>을 세 번 보기 전까진, 내 자전거를 마련해두고 싶다.

“3년 후, 5년 후, 나는 자전거를 샀을까?”


■ 영화 <남색대문>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남은 게 있을 거야. 그 남은 게 우릴 어른으로 성장시키겠지.“

두 대사 모두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점이 인상적인데요.

우리가 올해 여름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또는 기억할 만한 인생의 지나간 몇몇 여름을 나눠봐요!

■ 또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와요.(저의 최애 대사)

“장시하오, 다정하고 밝고 단순한 너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몇 년 후의 네 모습이 보여. (…) 눈을 감아도 내 모습은 안 보여. 하지만 네 모습은 보여.”

여러분의 지나간 날들 속, 나의 미래보다 선명하게 그려지던 친구가 있나요?

■ 올 여름에 꼭 하고 싶었는데 아직 못한 것(혹은 미처 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은 것)과 올 여름에 약속한 대로, 다짐한 대로 해낸 것이 있다면?

(혹, 시간이 남는다면)

■ 계절마다, 시절마다 반복해서 꺼내보게 되는 콘텐츠가 있나요? 나만의 계절을 불러일으키는 구실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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