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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Oct 20. 2020

사과

 

오늘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하러 가지 않았다. 휴대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해놓고 한 시간 간격으로 잤다. 스스로의 무책임함에 기가 질렸을 때, 같이 일하는 언니로부터 카톡이 왔다. 내 안부에 대한 물음과 함께 오늘 다른 요일에 근무하는 분이 대신 근무를 했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짧게 답장을 보내고 다시 누웠는데 아까보다 조금 더 긴 연락이 왔다. 본인이 이번 달까지 일을 하기로 했다며 남은 기간 동안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답장을 하지 못 했다.

 

지난주 금요일 밤 10시 35분. 주말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았다. 그날은 2층 테이블을 도맡아 일을 했다. 쉬는 시간에 고흐 그림을 보겠다며 오르세 미술관까지 다녀온 탓에 무릎은 감각이 무뎌진 채 자꾸 힘이 빠지고 발바닥이 쑤시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정돈하고 집에 가려는데 매니저님이 나와 언니에게 잠깐 나와서 얘기를 하자고 했다. 문제는 우리의 의사소통 부재였다. 더 정확히는 나의 일방적인 소통 거부였다. 확실히 나와 언니는 일을 하는 방식부터 달랐다. 주어진 일을 착실히 매뉴얼에 맞게 수행하고 손님 테이블을 끊임없이 주시하는 언니와 달리 나는 뭐든지 적당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나갔다. 사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언니가, 내게 끊임없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니의 말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만하면 내 할 일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여겼다.

 

그날 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지친 얼굴을 보며 나보다 열 살 넘게 많다는 사람이 표정관리 하나 못 한다고 여겼다. 매니저님은 혼자 일을 잘하는 것보다 서로 돕는 게 더 중요하다며 타지에 나와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를 못 하면 어떡하냐고 했다. 그날 처음으로 언니랑 같이 걸어갔다. 같은 지하철역으로 간다는 걸 대충 알 수 있었으나 함께 걸어간 적은 없었다. 언니는 모든 걸 자신에게 일임하는 매니저님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일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묻는다고 했다. 사실 그건 내 책임이었을 것이다. 언니와 헤어지면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생과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언니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잘못을 돌아보는 게 아닌 그녀의 나이를 운운하고 상황을 함부로 추측하며 안타깝게 여긴 게 내 오만이고 모순이었다.

 

언니의 카톡에 쉽게 답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과 나이, 하는 일과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한 달 넘게 같이 일한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파리 대학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혼자 산다는 것. 과거 갑상선이 좋지 않아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 정도. 이마저 내가 묻고 알게 된 건 하나도 없었다. 언니는 내게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애인과의 관계는 좀 어떤지,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는지, 쉬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처음에는 우리가 식사를 마친 후에 남은 반찬을 좀 싸가는 게 어떻냐며 묻기도 했다. 나는 매번 괜찮다고 했고 어느 순간 언니도 자신의 몫도 챙기지 않게 되었다.

 

같이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애인과 다루었다는 일로 시큰둥, 오늘은 몸이 좀 피곤하다는 이유로 시큰둥, 그냥 언니의 말이 잔소리처럼 여겨져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매니저님은 내게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거 알지만 상대는 무시한다고 느낄 수 있다며 상황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명백한 무시였다. 나는 마음을 열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민폐를 덜 끼치고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마주한 이기적인 내 모습을 더는 들여다보기 싫었고 파리에서 지낸 지 49일 만에 사과할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긴다는 것도 불편했다. 그런데 나보다 한 달 넘게 먼저 일하던 언니에게 그만둔다는 연락이 왔다. 카톡으로 내 상황을 변명처럼 늘어놓을 수도, 언니를 이해하는 척 문장을 만들 재간도 없다. 반드시 사과해야 하는 일. 아픈 건 몸이 아니라 스스로를 방어하고 날을 세우느라 곪아버린 내 마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이기적이면 일주일에 두 번 같이 일하는 사람을 힘들게 만든 걸까. 언니와 직접 만나 사과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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