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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Dec 28. 2020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실패할 거란 믿음

코로나 시대의 슬기로운 삶

_코로나 시대의 슬기로운 삶

: 코로나블루를 사라지게 하는 책 3

1. 실비 제르맹, 『밤의 책』, 문학동네, 2020.

2. 김희준, 『언니들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3.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문학동네, 2020.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실패할 거란 믿음





불현듯, 이 죽음만큼은 아무런 서사도 남기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가 그녀의 납작한 가슴을 더욱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엉킨 실타래의 마디 마디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나야만 하겠지. 가만히 잠든 이의 선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톰한 눈두덩 위로 아이라인 문신이 옅게 번져 있었다. 이미 색소가 다 빠진 상태임에도 그 오묘한 색만큼은 꼭 등 푸른 고등어의 비닐처럼 반짝였다. 지난밤, 그녀는 심폐소생술을 다섯 번이나 해야 했고, 얇은 살가죽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 갈비뼈가 산산이 으스러졌다. 일주일째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막내 삼촌은 숨을 꼴각꼴각 삼키면서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에 서명했다. 아직 2월이었음에도 우리의 봄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대구 신천지교회 관련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전국이 팬데믹의 공포 속에 떨어야만 했다. 매일 중환자실 앞에서 만나는 식구들의 인사에도 너희 집에는 마스크가 몇 개나 남았냐, 되도록 애들은 밖에 못 나가게 해라, 등등 모두 코로나 얘기뿐이었다.



할머니 장례식은 더없이 고요했다. 칠 남매 장녀로 태어나 오 남매를 홀로 키워온 여인의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단출했다. 뜨문뜨문 찾아오는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밥은 먹기 어려울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럼 우리 식구들은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로나가 내게 일깨워준 건 우리의 사랑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막연히 완벽한 형태일 거라 여겼던 사랑이 애초부터 불안한 상태였다는 것, 그걸 알게 되자 내 마음은 밤새 쌓인 눈처럼 단단해졌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던 문장과 감정이 서서히 내 안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경험했다. 지금도 내 마음은 번번이 무너지고 뭉개지면서 마음대로 자라나고 있다. 사랑이 실패하는 순간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은 책, 올해 문학동네 출간 도서 중에서 이 세 권의 책이 단연 가장 좋았다.



정영수 소설 『내일의 연인들』은 제목부터 사랑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 ‘이별’을 내포하고 있다. 결코,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내일이란 없다. 아주 먼 미래나 오늘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 너를 사랑할 거야”라는 힘없는 다짐을 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맡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당장) (이 순간) 사랑해”라는 확신만이 순간의 감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진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사랑의 반짝이는 순간은 보여주지 않는다. 도리어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마음이 어떻게 무너지고 부서지는지 들여다본다. 결국, 소설 속 화자는 사랑에 있어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가 되는 셈인데, 이들은 당장의 선택을 유보하고, 상대에게 책임을 떠맡긴다. 하지만 매번 비겁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랑에 ‘내일’이 있을 거란 믿음으로, 그 어리석음에 기대어 아주 가까운 곳부터 이국의 먼 땅까지 망설임 없이 떠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탈 것’에 의지한다는 사실 역시 흥미로웠다. 「우리들」에서 나와 현수, 정은은 붉은색 혼다를, 「더 인간적인 말」에서 나와 해원, 이모는 비행기를, 「서로에 나라에서」 화자는 중고 혼다 스쿠터를 몰던 자신이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마저 타자화시키는 이 비겁하고도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 나는 여러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과연 완벽한 사랑이란 존재할까. 어쩌면 그건, 자신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실패를 마주하기 두려운 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닐까. 작가의 말 “『내일의 연인들』에 실린 소설들 속에서 내가 지나온 시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232쪽)을 읽고 나서 내 사랑은 전부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영원은 없고, 대신 시선만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낯선 모습을 반드시 목격하게 된다. 잠든 할머니를 내려다볼 때마다 그녀가 아주 잠시만이라도 나의 영혼과 영원을 송두리째 가져가길 바랐지만, 그건 허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머물렀던 시선만큼은 내 안에 줄곧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랑이 실패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하마터면 그리움이라는 걸 영영 모르고 살 뻔했다.



그 시절 민물의 사람들이었던 페니엘 가족은 자신들이 소유한 배 ‘알 라 그라스 드 디외’(프랑스어로 ‘하늘에 운을 맡기고’라는 뜻)라고 불렸다. 실비 제르맹의 장편 『밤의 책』은 한 편의 신화 같다. 1870년 보불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페니엘 家 사람들의 어두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다. 작가는 인간의 증오와 광기 그리고 끔찍한 비극 속에서도 담담하고 유려한 문체를 잃지 않는다. 창기병의 칼에 맞아 두개골이 으깨어진 아버지를 가족들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광기 어린 끔찍한 웃음소리였다.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자신의 딸을 범하고, 딸은 아버지의 아들을 낳는다. 여섯 장의 차례로 구성된 이 책은 한 가문의 반복되는 비극과 역사적 배경을 통해 거대한 서사시를 완성한다. 누군가의 불행이 다시 그 자식에게 10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 테오도르 포스탱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신의 무관심과 잔혹함 때문이라 여기고서 이내 하늘을 저주하고, 빅토르플랑드랭은 자기 아들이 전쟁의 불행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엄지와 검지를 절단한다. 세계의 불행이 국가, 마을, 가문, 개인에게 전이되는 과정과 긴긴밤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페니엘 家 사람들을 보면서 어쩌면 모두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자신의 불행한 숙명에 대해 괴로움을 토로했다면 지난했던 100년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내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마스크 속에 표정을 숨긴 사람들을 마주할 상상을 하니 두렵기보단 서글퍼졌다.



곰곰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당신의 슬픔에 깊게 관여하는 일,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김희준의 시는 ‘슬픔이 묻힌 동산’이다. 시인의 입속에는 노란 나비가 날아다니고 그의 몽상에는 지난밤의 오독으로 가득하다. 그의 시가 좋았던 까닭은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뜻 모를 묘사를 하는 대신에 실직한 아버지, 파스 붙여 달라고 하는 아버지, 때때로 형과 동생을 소환해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한다. 문득, 나와 동갑인 그녀가 올리브 동산에서 걸음이 느린 나의 할머니를 천천히 기다려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책을 하진 않을까, 라는 상상을 했다. 아니면, 겁이 많은 할머니를 안고 소행성으로 날아갔을 수도. 「안녕, 낯선 사람」에서 “여긴 여름이야 / 거긴 어때?”(110쪽)라는 물음에 ‘여긴, 늘 지옥이야. 그래도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고 혼자 대답하기도 했다. 좋은 시는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매일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기에 시집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호흡을 형성한다. “애인이 없어야 애인을 그리워할 수 있었다”라는 말속에서 그가 사랑의 실패에 대해 그 버석한 마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를 전부 이해할 순 없지만, 그가 쓴 단어와 문장의 작은 실패까지 모조리 사랑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영영 시들지 않도록 아주 작고 여린 것들을 사랑하며 시를 읽어야지. 언제든 우리의 사랑이 실패할 수 있단 다짐으로 천천히 올리브 동산에 올라 김희준 시인을 만나야겠다.



이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호소한다. 그 마음은 비단 역병에 대한 공포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 대한 불확실과 앞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짙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실패할 거란 믿음으로, 조금 더 나 자신이 무너지고 좌절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실패한 사람만이 반드시 사랑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원고지(200자 기준) 19.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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