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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ug 17. 2021

우리만의 단어사전


애인이 파리에 왔다. 한 손에는 기내용 캐리어를 들고 작은 노트북 가방을 멘 채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추자 그 부드러움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누나, 나는 당신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리워. 사무치게 그리워.” 무수히 많은 밤 속에서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척 도망쳤다. 사랑을 말하는 이에게 인내와 침묵을 강요하는 날들이 쌓여만 갔다.


대학 졸업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했다. 귀금속 가게, 여자 보세 옷 가게, 참치 가게와 같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을 때 지금의 애인을 만났다. 옷 가게 막내로 들어가 온종일 다림질을 할 때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옷의 구김을 펴고 있는데 스팀다리미 선이 터지면서 손목 위에 화상을 입었다. 순식간에 살갗이 벗겨지고 팔 전체가 뜨거워지더니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에 병원을 갔어야 했지만 물티슈 두 장을 이어 묶은 뒤 팔목에 칭칭 감고서 일을 했다. 여름에는 상처가 더 쉽게 덧나기 마련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목에 난 흉터의 출처를 물었다. 때때로 예민하고 한없이 다정한 내 애인을 제외하고.


“누나, 마음은 괜찮아요? 손목 말고 누나 마음 말이에요.”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내 마음에 대해 묻는 사람, 그날 이후 밤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 달 전 인천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입으로만 웃고 있었다. 여름에 만나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난 애인을 탓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동자를 그대로 내비치는 사람.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집 근처 아랍 슈퍼로 가 몸이 길쭉한 쌀과 고기를 샀다. 그는 집으로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프라이팬에 물을 붓고 쌀을 쏟더니 밑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저었다. 그 모습을 내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뻗어 세게 안아주었다. 오랜 시간 끓인 쌀은 통통하게 불진 않았지만 아주 부드러웠다. 파리에 도착해서 세 달 만에 먹는 집 밥이었다.


파리에서의 나의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그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빵집과 서점에 가는 일. 내가 한식당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면 그는 바로 옆 중국 찻집에서 유자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렸다. 한국에서도 파리에서도 그는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번번이 그에게 가는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고작 파리에서 한 계절을 보냈을 뿐인데 너무 깊게 지친 그가 미운 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우리는 매일 싸웠고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도시를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된 여자는 한없이 이기적이었고 너무 먼 길을 돌아온 남자의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가 또 한 번, 이별을 말하던 밤. 그는 나에게 파리에 온 이유를 물었다. 사실 파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마음이 유약한 부모와 형제, 계절이 변할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친구들 그리고 제일 어려운 나 자신과 멀어지고 싶었다. 하루하루 먹고 자는 일만 해결해 나가면서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는 모든 관계와 가치들을 잠시 내려놓길 원했다. 이기적인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는 내게 여전히 당신이 그립다고 말했다.


그가 나의 오른 손목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름날의 흉터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만큼 옅은 자국만 남아있었다. 그 자리에서 반 뼘 올라오면 엄지손가락 마디 사이에 참치 가게에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다 유리컵을 깨뜨리면서 생긴 자국이 남아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모두 연결했더니 막연히 상상만 하던 도시에 5개월째 살고 있었다. 그에게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처음으로 물었다. 오직 나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 오기까지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누나가 손목 위에 화상 입은 걸 보는데 처음에는 아팠고 그다음에는 마음이 가더라.”


내 상처를 보고 마음에 대해 물은 사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권에는 여전히 만료 기간이 7개월이나 남은 프랑스 비자가 부착되어 있다. 부모님은 내가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말했고, 친구들은 지금이 아니면 너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울 거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사는 곳이 낯설게 느껴져도 힘들지 않을 것 같고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이제는 그가 말한 ‘보고 싶다’와 ‘그립다’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난가을, 몸보다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던 연인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그립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제 본 나의 애인이 무척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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