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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11. 2020

소진되었습니다.
소진하겠습니까?

나를 다정하게 부르던 이들은 전부 내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









여전히 엄마는 내 이름이 아쉬운가 보다. 점쟁이로부터 큰딸 이름이 에너지를 ‘소진’시킨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잊을 만하면 개명 얘기를 꺼낸다. 어제만 해도 내가 기운이 없고 좀처럼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내 이름이 에너지를 소진시키기 때문’이라며 좀 더 강한 이름을 찾아보자 했다. 


개명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엄마의 순진함을 놀리면서 내 모든 것을 소진시키며 살 거라 다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 이름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화장품 가게에 선크림을 사러 갔다가 인기 품목마다 ‘재고가 소진되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적힌 걸 보고 왜 음식점이나 잡화점에서는 더 이상 ‘품절’이 아닌 ‘소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까.


그건 마치 ‘미안하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어요, 하지만 언제고 나를 찾아준다면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날 거예요.’라는 말처럼 상대의 속상한 마음을 타이르는 듯이 느껴졌다. 사실 내 모든 말과 감정을 불 싸지르고 소진시키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밥을 먹거나 걷는 속도는 빠르지만 글을 읽고 쓰는 건 느리고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나를 다정하게 부르던 이들은 전부 내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 내 마음이 작은 택배 상자처럼 수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보내는 마음부터 닿는 순간까지 별을 쭉 그을 수 있었다면 조금 덜 아팠을까. 내 이름이 지닌 궁극적인 외로움은 삶의 수많은 여지와 반전이 두려워 침묵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의 오묘한 경계 사이를 도망치던 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책임지기 싫어서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환상 대신 출처 없는 외로움을 키우곤 했다. 모두에게 기억되길 원하면서 영영 사라지는 걸 꿈꾸는 건 나의 오래된 모순이다. 세상의 모든 단어가 실은 서로의 반의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내 이름이 담아내지 못한 사랑과 사랑 또다시 사랑에 대해 곱씹었다. 


최근에는 오랜만에 낯선 이와 데이트했다. 새로운 만남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주일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늘 소진, 하고 운을 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늦은 저녁을 먹은 뒤에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걸을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서로 끊임없이 말들을 만들어내면서도 소진, 이라는 쉼표를 찍지 않는다는 건 우리에게 두 번의 데이트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수 없다는 걸 암시했다. 점을 치는 여인은 몰랐을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이 수만 가지의 감정을 공유하며 매일 변화하고 싸우고 버티기도 한다는 걸.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내 이름의 온도는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난 내 이름이 아쉽기는커녕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벅찰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서로 이름을 알고 지낸 사이는 그 이름을 자주 부를수록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작년에 한 술자리에서 엄마가 자꾸 개명하라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더니 유일하게 시시하지 않은 남자가 내게 “소진, 얼마나 예쁘니. 소진, 절대로 개명하지 마. 소진이는 이름만 예쁘지”라고 말한 게 너무 좋아서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둘 만큼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밝을 소에 참 진. 오늘도 내 이름이 조금 더 낯설고 다정하게 느껴지길 원하면서. 진심과 진심 사이를 헤매고 있다. 결국 내 이름을 쓰다듬고 매만지게 되는 것도, 나를 가장 오래 사랑하게 될 것도 나 자신임을 알고 있기에 내 이름의 외로움 정도는 거뜬히 안을 수 있다. 오늘도 망설이지 않고 소진할 것.




대학내일 [856호 – 20’s voice]

WRITER 윤소진 leeun0651@naver.com 이번 가을 파리에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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