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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Nov 23. 2021

06. 일기떨기

나는 화려한 싱글이 될 수 있을까

결혼식용 치마는 구토와 함께 잃었다.


또 한 번의 결혼식이 끝났다. 시월에만 격주로 각각 두 번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첫 번째 주말에는 지현이 친오빠 결혼식에 가기 위해 부산을 당일치기로 다녀왔고, 어제는 대학교 동아리 선배였던 민석 오빠 결혼식에 갔다. 아직 한 번의 결혼식이 더 남았고 언제 또 청첩장을 받을지 모른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오빠가 웨딩 로드에 올라섰다. 문득, 저 인간 요즘도 술 마시면 코가 시뻘게져서 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나는 나보다 네 살 많은 민석 오빠의 천진난만함을,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 하는 선한 마음을 참 아꼈다. 고작 스무 살이었음에도 우스갯소리로 “오빠는 결혼하기 전에 나한테 꼭 보여줘야 해. 사람이 영 맹물인 게 착한 여자도 나쁜 여자로 만들 것 같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오빠 옆에는 그보다 더 선한 얼굴의 신부가 말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꼭 한여름 이팝나무의 하얀 꽃송이가 푸드덕 터지는 것처럼 팡, 팡, 팡.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과 함께 한 시절이 저물고 있었다. 내게 그 어떤 아쉬움이 남을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자꾸만 먹먹했다.     


  몇 해 전부터 ‘여자 인생 결혼과 출산만 빼도 발 뻗고 잘 수 있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지, 그걸 내가 다시 조합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종종 하는 말이었다. 요즘은 간다는 말도 없이 훌훌 떠나는 배신자들이 속출해서 어디 말할 곳도 없지만.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해서 아쉽다는 내 말에 경조사 프로참석러인 오빠 한 명이 “나한테 실버타운 가자던 사람들, 땅콩주택 짓고 주말마다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자던 사람들 다 갔어. 나만 남았어.”라고 했다. 정말 하나둘 자기와 똑같이 웃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오늘의 나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보다 그저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싶다. 비슷한 마음으로 나의 연인이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빠’보다 그저 그냥 내 애인,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애인이기만 했으면 한다. 서로에게 부여되는 역할 때문에 혹은 계산기만 두드리다 상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알아채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다.     


  누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결혼’보단 타인의 삶에 ‘무임승차’하고 싶었다. 나보다 조금 더 책임감 있고, 더 경제관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혼자보단 둘이 낫겠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는 정상 가족을 지향하고 제일 끝내주는 대출도 ‘신혼부부 전세대출’이 아닌가. 사랑의 유효기간이 어차피 3년이라면 그보다 더 끈적끈적하고 긴밀한 대출 공동체가 되는 편이 낫다고도 여겼다. 죽도록 서로가 미운 밤이면 혼자 휴대폰을 붙들고 질질 짜는 것보다야 미워도 내편인 원수라도 누워 있는 게 속편 하지 않을까. 남의 결혼식에서 불순한 생각만 하는 게 민망해서 식권을 받아놓고 뷔페도 가지 않고, 답례품으로 교환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본 반 70이 된 오빠들을 데리고 집 앞 한식주점에서 소주를 마셨다. 올해 처음 마시는 소주였다고 하면 믿을까. 오랜만에 마신 술에 혼비백산이 된 나는, 여동생이 뺨을 열 번을 쳐도 못 일어날 만큼 인사불성이 되었고 집에서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오열했다. 3년 만에 마주한 주사였다.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냐는 카톡에 다른 건 모르겠고, 올해 결혼한 인용 오빠가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우리 엄마한테 “안녕하세요. 저는 소진이 대학 선배인데요. 네, 이제 얼추 10년 선배인데요.”라고 인사한 것만은 또렷하다고 답했다. 아,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가는 흑역사도, 창피한 마음도, 빈곤한 계산기도 나만 보고 싶다. 나 자신만을 원망하며 살고 싶은 나는 화려한 싱글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내년에는 결혼식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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