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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r 03. 2022

12. 일기떨기

내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던 날은 그날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지난주 금요일을 끝으로 영업 과장님이 퇴사했다. 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출했고, 별다른 인사말을 따로 남기지도 않았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와 실장님, 부장님, 과장님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 회사 근처 횟집으로 갔다. 저자 선생님을 모시고 왔던 이곳은, 요리가 깔끔하게 나온다는 게 장점이었으나 대화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적막이 흘러 숨이 막혔던 걸로 기억한다. 실장님이 예약한 방에 들어가 저녁 정식 세트 네 개와 카스 두 병을 시켰다. 모름지기 회에는 소주이고,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소맥을 말아줘야 하는데 누구 하나 그럴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나와는 3개월 차이를 두고 입사한 동료의 퇴사였다. 나보다 사회생활 경험이 10년은 훌쩍 넘게 많았음에도 “소진 씨가 입사 선배니까, 나한테는 선배나 다름없죠.”라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사무실의 불을 켜고 아침에는 책 출고 처리 및 인터넷 서점 관리를 했다. 점심 먹고 1시부터 6시까지는 대형 서점의 직원들을 만나 신간을 소개하고, 구간의 매대 진열 상태를 살펴보는 일.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철로 이동하는 데 쓴다는 그의 하루를 퇴사 얘기를 듣고 나서야 상상해 보곤 했다. 함께한 1년 반 남짓은 서로의 일을 분리하고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만, 그 미묘한 영역에 대해서만 선을 넘지 않는 걸 최선으로 삼았다. 과장님의 맥주잔이 넘치지 않을 때까지 술을 채우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파주 창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이에요. 그때 조수석에서 잠들었던 거 죄송해요. 자유로를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실장님과 부장님은 그런 일이 있었냐며 웃어넘겼지만, 내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던 날은 그날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달 매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사장님이 이제 오프가 아닌 온라인 마케팅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할 때마다 모르는 척했다. 외근을 마친 그가 사무실로 복귀하고 혼자 남아 면담을 할 때에도 집이 멀다는 이유로 짐을 꾸리기 바빴다.

 점심을 먹을 때마다 과장님과 눈이 마주치면 오늘은 어디 서점에 가는지,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 사정은 어떠한 지에 대해 물어보곤 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식구들보다 더 많이 밥을 먹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 업무 이상의 일에 대해 묻는 것을 삼갔다. 그때마다 요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작년에 등록한 헬스장은 좀 나갔는지에 대해 물었다면 어땠을까. 미리 끓여 놓은 듯한 매운탕이 나오자마자 우연히 배우 전미도 얘기가 나왔다. 그 배우, 계속 무대에서만 연기하던 사람인데도 브라운관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발성도 표정도 자연스러워서 꼭 자주 보던 사람 같다고. 그러자 과장님은 뮤지컬 무대에서의 전미도에 대해, 과장님은 오래전에 봤던 연극에 대해 얘기했다. 과장님은 내가 본 사람 중에 뮤지컬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낮의 지하철 풍경에 대해서는 끝내 묻지 않았다. 그저 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나도 꼭 불러달라고, 가서 축의금도 하고 밥도 먹고 오겠다고 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보라매 공원의 벚꽃이 피기 전에 그만둔 동료에 대해, 그리고 좋은 동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대화 주제

Q. 퇴사를 결심한 순간 혹은 경험에 대해

Q. 직장 동료와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Q.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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