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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r 16. 2022

13. 일기떨기

아무도 모르게 구름보다 높아졌던 그 밤의 기분을


별안간 야경이 20% 정도로만 밝혀 있는 깜깜한 도시 한가운데에 서 있다. 나는 직감한다. 또 그 꿈이구나, 이제 곧 날겠구나.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있지만 몸에 힘을 주고선 발을 구르는 동작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꿈속의 나는 천천히, 붕 뜬다.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걸까. 아득한 생각이 들 때쯤 몸은 상승을 멈추고 유영하기 시작한다.

아주 오랫동안, 하늘을 나는 자각몽을 꿨다. 거짓말처럼 하나의 꿈만 지독하게. 기억이 맞다면 최초의 자각몽은 고등학생 때다. 여기서 키가 더 크려나 싶기엔 이미 십 대 후반이었고 꿈은 이십 대 중반, 첫 직장을 퇴사할 무렵까지 계속됐다.

덕분에 나는 새벽의 지상 위 공기가 어떤 온도인지, 얼마나 부드러운지 기억하고 있다. 바이킹 중간 자리에 앉아 있는 듯 배꼽 위가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느낌과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기자기한지도. 이 꿈에서 하강은 없다. 하늘에서부터 시작한 꿈 역시 한 번도 없었다. 비행은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좀 지겨울 정도로.

지겨울 정도로 계속돼서 관성적으로, 심드렁하게 하늘을 둘러보는 날도 있었다. 하늘을 누비는 것보다 극적인 사건이 뭐가 있겠냐는 듯 말이다. 실제로 그동안의 자각몽에서 비행 그 이상의 사건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현실에서의 하루가 좀 별로인 날엔 역시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오늘은 좀 날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대체로 나는 비행하는 밤을 맞았다. 전부 허상이기는 해도, 원한다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게 꼭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 같았다. 두텁고 아득한 밤의 장막을 내 뜻대로 걷어낼 수 있다는 은밀함이 그보다 더 무겁고 막막한 현실을 견디게 한 셈이다. 잊고 싶은 하루의 끝에서 두 눈을 꾹 감으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번쩍 눈이 뜨이는 기분. 말하자면 그건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을까?

사실 나는 비행 자체보다는 비행 직전과 직후의 감각으로 이 자각몽을 사랑했다. 매번 낯선 도시에서 눈을 뜨지만 개의치 않고 이내 과감하게 발을 구르는 나는 한없이 자유로워 보인다. 스스로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포즈. 그건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더욱이 현실에서 취하기 어려운 자세였다. 어느 때보다 확신이 필요한 때였고, 다름 아닌 꿈속의 내게서 비슷한 게 흘렀다. 가능성의 무드가.

자각몽은 어느 시점부터 더디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는데 일단 꿈을 맞닥뜨리면 거부할 수 없이 날아야 한다는 사실이 때때로 피로했기 때문에, 자각몽의 빈도가 잦아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영영 땅에 꽁꽁 묶인 신세다 보니 이제와 ‘꿈 일기’ 같은 것을 쓰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랬다면 어떤 비행들은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었겠지. 무의식의 가시적인 흔적은 제법 선명한 위안이 되었을 거다.

내가 꾼 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예고 없이 나타나 나를 현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한 시간이 정말로 꿈에서나마 존재하긴 했던 걸까? 꿈은 환영처럼 흩어졌을지라도, 한창 비행 꿈을 꿨던 시절의 날들은 나의 오랜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꿈을 꾸어도, 꾸지 않았어도 하루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뜻밖에도 오늘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위로로 다가온다.

그래도 가끔은 그리워지겠지. 아무도 모르게 구름보다 높아졌던 그 밤의 기분을.



대화 주제     

■ 여러분은 가장 최근에 무슨 꿈을 꾸었나요? 혹은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는 꿈이 있나요? 꿈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 자각몽은 수면자가 꿈꾸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에 꿈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고, 깨어나서도 꿈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특징이 있다고 해요. 만약 여러분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각몽을 꿀 수 있다면, 어떤 꿈을 꾸고 싶나요?

■ 여러분은 평소에 잠을 잘 자는 편인가요?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 어떻게 견디는지, 요즈음의 수면은 대체로 안녕한지 궁금하네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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