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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pr 19. 2022

15. 일기떨기

그리고 서른에는 보다 가뿐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




  스물아홉 생일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모인 일기떨기 언니들이랑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니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지하철에서 생일을 맞이한 셈이다. 집에 새벽  시쯤 도착했는데 식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집에 늦게 오니까 음식을 따로 준비하지 말라는 말에도 엄마는 미역국을 끓였다. 아빠는 코알라가 좋아한다는 유칼립투스를  왔다. 얼마 전에 내가 키우던 란타나, 태오가 죽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종종 아빠가 낯설게 느껴진다. 다음 , 회사에서도 케이크를 먹었는데 초가 많아서 불이  뻔했다. 생일 직전에 카카오톡을 탈퇴해서 메신저에 등록된 친구가 서른  안팎이다. 최근에 번호를 바꿔서  근황을 아는 이도   없다. 작년에는 카톡 친구들에게 끝도 없이 생일 축하를 받았던  같은데, 올해는 식구들과 문어뱅스 그리고 친구  명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생일 당일에는 퇴근하고 신촌에 가서 소설 수업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 생각을 정돈하는 일. 별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생일을 마무리한다는 게 좋았다. 아마 소설 수업이 없었다면 주짓수에 갔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신촌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카페에서 소설가 조영아 선생님과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다. 선생님과 나는 생일이 같은데, 나는 이솝 핸드솝을 드리고 선생님으로부터 작고 예쁜 노란 장미를 받았다. 내가 올해 초 인스타그램을 탈퇴하고, 최근에는 카톡을 다시 개설했다고 하자 선생님은 그게 다 늙어가는 증거라고 하셨다. 지금은 신도림 역이고 서동탄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요즘은 책을 포함해서 내가 가진 물건들을 죄다 정리하고 싶다. 이것도 강박이라면 강박일 것이다.

  최근에는 책장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아직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두 개 더 남아 있지만 차근차근 정리해나갈 계획이다. 꽤나 극단적인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다. “내가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정리하는 식이다. 신간을 사서 깨끗하게 읽은 다음에는 되팔거나 선물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책 좀 그만 사들이라던 부모님도 얼마 전에 산 것 같은데 벌써 정리하냐며 묻는다. 작년에 만든 독립출판물도 겨우 두 권 갖고 있고, 회사에서 작업한 책들도 pdf로 된 작업 파일만 있을 뿐 따로 보관하고 있지 않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며 색상별로, 제형 별로 사들였던 화장품도 다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안색이 아주 나쁜 날에만 컨실러를 조금 사용하고, 립스틱은 단 두 개뿐이다. 장롱과 화장대에 있는 모든 물건을 구겨 넣으면 29인치 캐리어에 얼추 다 들어갈 정도이니, 미니멀리스트라고 해야 할까?

  이것도 부족하다 생각한 나는, 최근에는 블로그에 있는 대외활동 폴더를 완전히 삭제했다. 각종 코스메틱 브랜드부터 잡화 생활 건강 관련 브랜드 서포터즈 그리고 기자단과 영화제 스텝까지. 지난 모습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한꺼번에 정리했다. 미련이 많아서 편지 한 장, 사진 한 장 지우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물건만 치우기에만 급급하다. 올해는 줄곧 미뤄온 편지와 사진도 보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무작정 눈에 보이는 족족 없애는 것 같아도 나에게도 나름의 룰이 있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내 일상을 그럴싸하게 꾸미는 일에는 더는 관심도 마음도 가지 않는다.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지금, 단연코 지금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으니 일단 만족이다. 그리고 서른에는 보다 가뿐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   




대화 주제

Q. 서른이 되었을 때 했던 다짐 혹은 기분에 대해

Q. 얼마나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지, 가장 아끼는 것은 무엇인지

Q. 호텔에 일주일간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무엇을 챙길 것인지

Q. 절대 버릴 수 없는 책 한 권이 있다면 무엇이고, 그 이유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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