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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May 25. 2022

18. 일기떨기

오늘도 그 남자는 문을 두드릴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회사에서 받은 호신용품 



 오월에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회사 근처 파출소 순경이다. 매번 같은 제복의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의 태도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금 당장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가 없다. 피의자가 경찰서에 와서 조사를 받게 되더라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훈방으로 풀려날 거라 했다. 그 말은 즉, 알아서 조심하고, 알아서 피하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당장의 해결 방법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피해 상황과 지금 겪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 신중하게 들어주기만 했어도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받은 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왜와 같은 육하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 목격자 진술서였다.

  이달 초부터 같은 층에 근무하는 다른 회사 대표로부터 지속적인 정신적 손해를 입고 있다. 회사 건물 일 층에서 내 상사이자 동료에게 담배를 한 개비씩 요구한 게 그 시작이었다.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인사도 하던 사이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건넨 호의였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담배 한 갑, 만 원짜리 한 장 이런 식으로 부탁이 아닌 협박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나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의 눈을 피해 남성 동료 한 명에게만 은근히 요구를 해왔고 점점 그 도가 지나치기 시작했다. 근무 중인 사무실에 들어와 욕을 하는 건 부지기수였고,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툭툭 치고는 씩 웃고 돌아가기도 했다.

  불과 2주 전에는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내 동료의 의자를 발로 차고 욕을 했다. 경찰이 다녀간 지 반나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공권력을 낭비한다며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내뱉었다. 나는 맞은편에서 그 모든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음성 녹음까지 한 다음에 경찰을 다시 불렀다. 그런데 경찰의 반응은 똑같았다. 당장 심각한 상해가 일어난 게 아니니 재택근무를 하거나 문을 잠그고 생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둘 중에 누구 한 명이 칼에 찔리거나 심한 상해를 입어야 끝나는 거냐는 내 물음에는 위험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하고, 방문 횟수를 기록하고, 폭언을 녹음해 증거로 남기라고 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자꾸만 이어졌고 지금도 사무실 문을 닫은 채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르는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다. 회사 책상에는 실장님이 주신 호신용 스프레이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놓여 있다.

  일주일 전에는 여동생이 일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경찰이 왔다. 케이크를 주문하는 남자 손님에게 마스크 착용을 부탁하자 그가 별안간 상욕을 하면서 난동을 피운 것이다. 여동생과 내 또래 점장이 칼을 쥐고 뒤로 숨은 채 떨고 있음에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미친놈을 피해 숨어 있는 상황에서 20대 여자 한 명이 울고 있는 동생을 향해 조각 케이크를 주문했다는 말에는 숨이 턱 막혔다.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든 건 카페 사장의 태도였다. 경찰에 신고한 직원들이 바로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그는 4시간 넘게 연락 두절 상태였다. 전화를 받았을 때 남긴 말이라고는 “그러기에 남자 직원을 한 명 둘 걸 그랬어.”라는 지금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망언뿐이었다.

  여동생은 그날을 끝으로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다음 날 사장으로부터 사과를 받았으나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건 마땅히 사과받아야 하는 일에도 엄마와 언니 남자 친구와 함께 가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날 밤, 여동생의 상황을 전해 들은 애인은 카페에 함께 가겠다고 했다. 나중에 여동생으로부터 그가 엄마를 모시고 가서 정당한 사과를 받을 수 있게끔 도왔다고, 정말 고맙고 든든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부당한 상황에 함께 맞서주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이어 떠오른 생각은, 과연 사장이 건장한 성인 남자를 대동하지 않았어도 사과했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오월에는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외면당해야 했고, 혼자 맞설 수 있는 일 앞에서는 뒤로 숨어야만 했다. 여전히 회사 사무실 문을 잠근 채 생활하고 있고, 회사에서는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실망한 건 미친놈 한 명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과 팔짱을 끼운 채 상황을 지켜보는 동료들이었다. 최근에 본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서는 피해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범죄학자 이수정 교수는 N번방은 결코 조주빈만의 만행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거미처럼 기묘하게 얽힌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뿜어낸 실로 온몸이 묶인 채 도움을 요청할 길이 없었던 사람들, 이 끔찍한 지옥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것 역시 바로 그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먹먹하고 미안한 마음만 든다. 오늘도 그 남자는 문을 두드릴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대화 주제

Q. 최근에 소진처럼 인류애를 가장 상실했던 일이 있는지.

Q. 회사 혹은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겪었던 부당한 사건이 있는지.

Q. 명백히 부당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겪었던 적이 있는지.

Q. 어릴 때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폭력적이었던 말자라면서 괴로웠던 말.

“그러기에 여자가 조신하게 행동해야지.”

“네가 조심했어야지.”

Q. N번방 구매자 340명 중 감옥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고최근에도 성 착취물 657개를 내려 받아 소지한 20대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우리는 여전히 N번방에 대해 모른단 생각이 드는데요무뎌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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