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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Jun 23. 2022

19. 일기떨기

엄마에겐 언제나 이런 곁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 깨닫는 밤




2022년 6월 4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엄마랑 저녁을 함께 보냈다. 엄마가 오늘도 당진에서 얼려온 추어탕을 먹으려나, 그게 물린다고 하면 연포탕을 끓여줘야 하나 고민하며 집에 가는데 웬일로 바람을 쐬고 싶다고 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는 내내 기대만큼 맛있지는 않다고, 엄마가 외식을 할 때마다 으레 늘어놓는 익숙한 패턴의 품평을 들으면서 내 몫의 들기름 메밀국수를 다 먹었다. 사실 내 생각에도 그리 맛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랑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소박한 식사를 하며 해가 길어진 초여름 밤하늘도 올려다보고 하는 것이 내심 좋았다. 다만 항암 직후 며칠 간은 부작용이 가장 심할 때라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자고 할 게 빤히 보여서, 그릇이 바닥나는 게 아쉬웠다.     

엄마도 모처럼의 외출이 시시하게 끝나는 게 싫은 눈치라 카페라도 갈까? 떠봤더니 그러자고 해서 기뻤다. 이런 순간이면 나는 가끔 자존심이 상하는데, 꼭 썸타는 애한테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기르는 동안 유난한 사랑을 쏟으며 자식은 영원히 짝사랑하는 존재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내 입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다음 생엔 친구로 만나고 싶다가도… 문자씨와는 정말이지 무엇으로도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엄마도 나의 어떤 면면을 떠올리면 야속해지는 순간이 있겠지...) 아무튼, 카페가 근사해서 엄마한테 점수를 좀 땄다.     

“너 일하는 거 보면 아주 돈 많이 버는 애 같아.”     

엄마가 대뜸 시비를 걸어도, 음 여긴 플랫화이트도 참 맛있네~하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 신경을 건드릴 힘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엄마는 사진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이번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의 애인된 마음으로 오늘의 인생샷을 담는다. 찍고 나면 홈마의 기분이 된다는 게 나의 딜레마다. 엄마는 이렇게 아파도… 내 속을 뒤집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대화는 최근 내 목에 주르륵 생긴 혹으로 옮겨졌다. 초음파 검사를 했고 다음 주에 판독 결과가 나온다.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고 혹의 크기와 통증은 커지기만 해서 솔직히 조금 무섭다. 엄마는 이미 목에 난 혹을 제거한 이력과 호르몬 문제로 임파선 결핵을 길게 앓은 적이 있기 때문에 내 경우도 안심할 수는 없다. 내 소식을 들은 지인들로부터 이젠 정말 무리해선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힘이 빠진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무리해야 해야 하는데? 이제야말로 어떤 때보다 무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담 무엇을 무리하지 않아야 하는지? 내 일을? 엄마의 간호를?     

조율, 보수, 균형 같은... 삶이 그럴듯하게 굴러가게 하는 건 내 전문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1+1처럼 엄마와 세트로 움직이려고 하니 아주 작은 결정에서도 내 이기심만 보인다. 나의 요즘이 그럴듯할수록 더욱더 그렇다. 나는 몸이 아프면 속이 상하지 않고 화가 난다. 인생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엄마 말마따나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도 아니면서,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열이 받는다. 스스로를 조금 기특하게 여길라치면 기다렸다는 듯 모자람을 확인시켜주는 인생이, 너무 애쓰지 말라고 초를 치는 것 같아서 분하다.      

쓰고 나니 좀 살벌한데, 이런 폭주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딸릴 정도로 몸이 상해서 결국 많은 일들을 미뤄둔 상태다. 암만 아니기를 바라지만 암이어도 어쩔 수 없지 뭐. 머릿속으로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모든 말들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는데 엄마가 기운을 차렸는지 실없는 소리를 또 했다.     


너 만약에 암이면, 엄마도 항암 더 안 해. 그냥 엄마랑 같이 죽자.

….

천국에서 만나는 거지.

…엄마 꿈도 크다. 천국 갈 생각을 하네?

나 천국 못 가나?

못 가지 않을까? 일단 나는 못 가. 그래서 엄마가 천국 가더라도, 나는 엄마 못 만나.

그럼 더 살아야겠네?

나 서른셋인데 그럼 암 걸렸다고 죽어?

살아서 뭐하니 이런 세상.

아니 그건 맞는데….

그래~ 그냥 죽자~

아~ 어차피 죽지 못해 사는 거니까 암 걸린 김에 기회다! 죽어버리는 거네?

그렇지!

됐어 작작해….    

 

하…. 중간에 적당히 끊었어야 했는데 엄마가 아프다는 투정 말고 다른 말을 거는 게 신나서 좀 받아줬더니 뭔 소리를 했나 싶다. 누가 들었으면 미친 모녀라고 했겠지.      

더 있을 수도 있었는데 엄마가 웃다가 자기 모자를 치는 바람에 벙거지가 벗겨져 삭발한 머리가 몇 초 정도 드러났다. 테이블 간격이 널찍한 카페였고, 손님도 별로 없어서 그 찰나에 엄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같지만 엄마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며 놀란 눈을 하고 얼굴을 감쌌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엄마가 손등만 덮은 검은 망사장갑을 끼고 있는 게 웃기고 짠해서—원래는 멋내기 용으로 샀지만 지금은 손등의 흉터를 가리려고 끼는 것이라—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엄마를 달래면서도 정작 그 너무나도 우아하고 깜찍한 장갑 때문에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     

집에 와서 엄마는 다시 괴로워하다 방금 잠들었다. 천국 얘기한 건 새카맣게 잊었는지 살면서 지은 죄를 항암으로 벌 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항암을 할 때마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니까, 이미 처방받은 약은 한계가 있다. 너무 힘들면 참지 말고 응급실에 가자고 보채는 대신, 오늘은 일단 그냥 옆에 누워서 모든 호소와 하소연을 들어주며 가만가만 대꾸를 했다. 그러고 나니 좀 나아지는 게 보였다. 늘 이런 방식으로 넘어갈 순 없어도, 엄마에겐 언제나 이런 곁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 깨닫는 밤.     

그리고 나도, 앞으로 내게 벌어지는 많은 날들을 좀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럼 자연스레 덜 무리하게 되겠지? 그게 무엇이든.


대화 주제     

■ 오랜만에 만났는데, 요즘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안부를 묻고 싶어요. 평소에 건강검진들은 다들 잘 받고 계시죠?    

■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저와 엄마의 대화처럼...^^ 최근 여러분들의 일상에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나요?

■ 저는 밀린 일기의 하루보다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끼어든 크고작은 즐거움들을 공유해주세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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