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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ug 03. 2022

22. 일기떨기

모두가 벨트를 매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여름 아침일지>     


6월 30일 

나는 내 욕망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에 가장 서툴고, 그건 한동안 사는 데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 좀 순응하게 만드는 쪽으로 이끌었던 것 같아 간편했다. 그러니까 나를 보는 데, 인정해버리는 데에 어느 정도는 간편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꾸준히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다보니 그 간소해진 마음이 방해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실은 “구체적으로” 바라는(것을 바라보는)일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걸, 뒤늦게 깨닫는 게 많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안개 속에서도 묵묵히 걷는 것 말고, 안개를 걷어내면서 걷는 날들을 보내게 되겠지.     


7월 1

어제는 모닝페이지의 여파 때문인지 집에 오니 너무 졸렸다. 어제까지 쓰고자 다짐한 부분이 있는데 다섯 줄인가... 한 문단을 겨우 쓰고 자버렸다. 그리고 오늘 7시 반 쯤인가.. 알람 없이 눈이 떠졌는데 살짝 열어둔 세탁실 문틈으로 스며든 빛이 주방에 실금을 그어놓았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볕이 든 것이다. 사방에 문을 열어두고 환기를 시키는데 기분이 좋았다. 산뜻하고 쾌적한 바람 그리고 빛. 30분 정도 좀 더 누워 있다가 8시부터 어제 못 쓴 소설을 썼다. 오늘은 컨디션이 좀 괜찮은 것 같다. 한 장 조금 안 되게 썼는데 이 정도 쓰면 안 풀리는 구간이 등장하고 약간의 쓰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조금 즐겁고 많이 괴로울 타이밍인데 그런 허점들을 잡아가는 게 결국은 재미있는 것 같다. 아주 넉넉하게 2시간? 3시간? 정도 더 붙들면 좀 정리가 될 것 같지만 여기서 멈추고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을 해서도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과 집중도인데 오늘은 그걸 박살낼 친구가 놀러온다. 하지만 나는 걔를 좋아하니까 괜찮다. 글의 실마리가 어디서 풀릴지도 모를 일이고. 작업 컨디션이랄까 루틴을 지키는 건 사실 나의 사소한 게으름을 정비하면 해결되는 일이다.      


7월 2

지금 나는 겨우 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쓰는 게 가장 익숙한 사람에서 쓰는 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익숙한 걸 좋아하게 돼 있으니까. 쓰기처럼 계속 하고 있는 건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데, 괜한 걱정을 많이 했다. 내 나이가 너무 내 인생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쓸데없는 나이부심을 스스로한테 부리고 있네. 무엇이든 이맘때 가장 많이 할 수 있고, 가장 잘 이뤄내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 나의 남은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의 내가 알면 가소로워할까 아니면 든든해할까. 먼저 나이 든 혜은들이 지금의 나만 철썩같이 믿고 마음 놓고 있을까? “나는 나의 가족이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그냥 나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내가 나의 가족이면, 가족이면... 지금의 나를 안심시켜주고 싶겠지? 어떤 나라도 반겨주겠지? 엄마, 아빠가 아닌 가족을 생각하는 건 나한텐 여전히 낯선 일이라 조금 뭉클하다.     


7월 14

아우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세상이 급속도로 망하고 있다는 것과 별개로, 지금처럼 나름대로의 재미를 뜻밖의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미래를 생각해도 시간이 너무 많다. 생각에 따라 희망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 하겠지. 이렇게 또,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건가? 알뜰살뜰하게 느끼며 사는 것도 싹 다 귀찮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지난 강연에서 일기를 쓰다 보면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덜 자주 잊게 된다고 했는데. 그 순간은 되게 확신에 차서 말했는데.     


7월 27

택시를 타고 집에 갈 때에는 누군가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라고 헛소리를 했고 그러자 돌림노래처럼 그럼 곧 세원이 생일(1월), 생일파티하고 나면 혜은이랑 은하 생일(7월), 그러면 다시 또 우연이 생일(9월)이라고, 금방 내년 가을이 돼 있을 거라고 해서 나는 눈 좀 붙이려다가 그냥 그렇게 시간이 반복되는 거지 뭐, 라고 했다. 자신의 생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 다른 친구의 생일을 세어보는 일. 어떡해, 어쩜 좋아 하면서 다시 초를 불고 축하하고... 아직까지는 그 짓이 심드렁하지 않고 즐겁다. 호들갑을 떠는 일. 서로 앞에서 누가 더 우스워지나 내기할 만큼 우스워지는 일. ...곧 마흔이 되겠다는 우리 얘기가 택시 기사님 듣기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래서 과속을 하신 걸지도. 뒷자리의 모두가 벨트를 매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갔다.      



대화 주제     

■ 여러분의 아침 루틴을 비롯해, 각종 루틴이 궁금해요. 사는 동안 어떤 루틴을 만들기를 시도해보았고, 또 유지하며 지냈나요?

■ 7월을 정산하는 월말정산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아래는 예시 중 각자 랜덤으로 골라 말해보기)

- 이달의 책 / 문장

- 이달의 소비 / 물건

- 이달의 장소 / 여행

- 이달의 음악 / 영화

- 이달의 음식

- 이달의 행복 / 슬픔

- 이달의 발견

■ 요즘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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