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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Jul 18. 2022

21. 일기떨기

이런 비겁한 마음을 열네 살 아이에게마저 들킨 걸까.



 종종 양귀자 『모순』에 나오는 안진진의 이모를 떠올린다. 재미없는 이모부와 틀에 박힌 생활을 하는 이모. 화려한 꽃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지만 금세 시들어버리고 마는 이모. 길가에 핀 들꽃 같은 김장우와 일평생 모순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나영규가 아닌, 여주인공의 이모를 생각하다니.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고요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월에는 모든 게 한꺼번에 끝이 났다. 내일채움공제 2년 형 만기 수령금을 받는 동시에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종 합격 메일을 받았다. 바닥을 보이던 입출금 통장에 1,600만 원과 약간의 이자가 들어오는 동시에 메일을 받았으니 정말 모든 게 끝난 셈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도 나는 자꾸만 끝에 대해 생각했다. 마냥 후련하지도, 지나간 시간이 아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공간에서의 내 모습이 걱정되거나 불안했던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적당히 곁을 내어주고 한꺼번에 마음을 들키곤 하는 사람이니까. 김장우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굴다가도 결국에는 나영규에게 전화를 걸 사람이니까.

 얼마 전에는 신촌에서 일하는 전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년 가을 즈음에 결혼을 하는데 내가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앞으로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더 남은 일에 대해 얘기하다니. 나와 만나는 동안 식당을 예약하거나 어디에 갈지 미리 찾아보는 법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식장을 일 년 전에 예약한 걸 보니 요즘 결혼을 많이 하기는 하는구나, 사람이 큰일을 앞두고는 달라지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전에 만났던 애인이 결혼을 한 적은 있어도, 나를 초대한 적은 없었던 나는 지하철에 멀거니 앉아 검은 옷을 입어야 할지 하얀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에게는 내가 거길 왜 가냐고, 너 정말 이상하다고 쏘아붙였지만 일 년 뒤의 일이라면 마음을 곱게 접어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지없이 떠오르는 그와 나눴던 짧은 언쟁 하나. 그 애와 나는 세상의 모든 사안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다가 결국에는 다툼으로 치닫는 재능이 있었다. 그날은 튈르리 공원의 아이스링크장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말았다. 나는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랑이라는 게 어차피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눈을 감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스케이트 끈을 세게 조이던 그는, 사랑한다면 상대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상대를 잘 알고 있어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에 반짝이는 트리 아래에서 잘잘못을 따지던 우리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니냐며 서로 빈정만 상하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사실 그 애가 결혼 소식을 알려온 건 놀랍지도 않았다. 문제는 내가 그를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너무 오래 사랑했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헤어진 애인에 대해 만날 때만큼이나 몰랐고, 지금도 그 애의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세 번의 여름이 지날 동안 그에 대해 진지하게 궁금해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사랑과 호기심은 늘 다른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고, 그거야말로 건강한 마음이라고 여겼으니까. 그건 사랑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구를 만나도 내 얘기는 능청스럽게 늘어놓을 수 있지만, 상대에게 질문을 하는 일은 늘 어렵게 느껴진다. 그가 사는 곳부터 하는 일과 취미와 같은 사적인 영역은 물론이고, 요즘 하는 생각이나 최근 즐겨 보는 프로그램과 같은 취향도 마찬가지다. 휴학계를 내고 주간지에서 일하면서 인터뷰이를 위한 질문을 고를 때마다 조금 덜 촌스러운 것, 상대를 민망하게 하지 않는 것, 질문과 대답이 그럴싸할 만한 것들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 하루는 카메라가 따라붙는 촬영이 아닌데 왜 나를 위한 질문들로 일상을 채워나가려 했던 걸까. 그건 순전히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함이 아닐까. 얼마 전에는 주짓수 도장에서 중학교 1학년 친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부터 요즘 만드는 책, 운동을 하는 이유까지 야무지게 묻는 친구에게 내 나름대로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선한 얼굴로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언니는 나한테 궁금한 게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벙찐 상태로  5초 정도 멈춰 있다가 지난주에도 물었던 학교 이름과 요즘 좋아하는 과목에 대해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게 없었다. 퇴근하고 이를 악물고 운동을 온 상태라 누군가와 말을 나누는 일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중학생의 일과나 요즘 고민은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늘 사랑받길 원하면서 상대를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니. 이런 비겁한 마음을 열네 살 아이에게마저 들킨 걸까.


대화 주제

Q.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Q.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킨 적이 있나요.

Q. 최근에 했던 대화 중 기억에 남는 것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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