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앞집에 상철이 형이 살았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 입학 무렵 그 형은 대학생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많지만 동네 어린 동생들과 잘 놀아줬다. 우리 누나와 엄마는 "키 빼기만 큰 싱거운 놈"이라 했다. 하루는 그의 동생 종우와 놀려고 형네 집에 가니 마루 기둥에 달아놓은 조그마한 거울 앞에서 빤쓰만 입고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고 있었다. 노래는 'LOVE POTION NO.9'이라는 팝송을 '위키 리'라는 가수가 번안한 곡. "그 약을 먹었더니 갑자기 용기가 솟아나고 배짱이 생겨 사랑에 성공했네, 럽 포션 넘버 나인!" 하는 가사다. 나중에 TV에서 보니 본명이 이한필인데 하도 삐쩍 마른 사람이어서 예명을 여태 WEAKY LEE인줄로만 알았다 이 글을 쓰려고 알고보니 WICKY LEE. 괜히 미안하다.
"어? 왔냐? 너, 춤 한 번 춰 봐"
종우는 어디 가고 집에는 형 혼자 있었다. (이 문장은 그시절 공중변소의 명작 '친구는 어디 가고 집에는 누나 혼자 있었다'에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 봄볕 따뜻한 마루에서 엉덩이를 흔들던 형은 내게 춤을 추면 빠다 볶음밥을 한 숟가락 주겠다고 했다.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뭐든 먹을 거라면 가릴 게 없던 가난한 시절이니 '빠다 볶음밥 한 숟가락' 욕심에 억지춤을 췄다. 춤을 추어 본 적 없으니 그저 몸을 배배 꼬거나 엉덩이를 흔들거나 했을 것이다.
형은 킥킥 웃으며 폭 꺼진 부엌에 들어가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볶은 빠다 볶음밥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 하라며 한 숟가락을 입에 넣어줬다. 그러나 형이 말한 "한 숟가락"은 밥숟가락이 아니라 찻숟가락 이었다. 속은 기분이 들었으나 처음 먹어본 빠다 볶음밥 맛에 놀라 기분이니 뭐니 생각할 게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밥이 있을까? 엄마가 참기름에 비벼준 밥과는 종류가 다른 고소함이었다.
형네 부모가 시장에서 싸전을 해서 그런지 흰쌀밥에 빠다와 소금만을 넣어 거의 누룽지가 될 만큼 바짝 볶은 까슬까슬한 식감은 질척한 보리밥에 참기름을 넣은 엄마표 비빔밥 따위는 감히 비교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형이 한 숟가락, 아니 한 찻숟락 입에 넣어준 빠다 볶음밥은 버터가 아닌 마아가린으로 볶은 것이었지만, 당시 버터는 '양키시장'이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고급 식재료였고, 마아가린조차 있는 집에서나 먹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 엄마는 마아가린이라는 이름도 모르셨을 거다. 아무튼 버터든 마가린이든 그냥 '빠다'던 때다.
훗날 그 맛이 생각나 아내가 외출한 어느 점심때 버터를 넣어서 한 번 볶아봤더니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마아가린을 넣으니 그제야 옛맛이 살아났다. 아이들이 분식집 떡볶이보다 학교 앞 문구점 떡볶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영양이나 건강을 생각하기보다 가능한 값싼 재료와 코 묻은 돈을 빼먹으려는 얄팍한 장삿속이 들어가야 맛이 나는 법이니까. 그게 색소로 범벅한 쫀디기나 아폴로 같은 그 시절 문구점 불량식품 인기의 비결이었을 거다.
상철이 형의 한 찻숟가락 버터 볶음밥을 영성체 하듯 받아먹은 뒤 '럽 포션 넘버 나인'에 맞춰 춤을 배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누나들이 마루에 앉아 뭔가 하고 있기에 그 앞에서 '막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허스키 보이스의 소유자" 가수처럼 나타나 춤을 추었다. 누나들은 떼굴떼굴 구르고 깔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애가 들어오더니 "춤 춰볼까?" 하는 말도 없이 느닷없이 춤을 춰대니 그게 우스웠던 모양이다. 누나들이 웃는 게 신이 나 더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고 팔을 휘휘 저으며 마당의 흙이 패도록 발바닥을 비벼대며 춤을 췄다. 반주가 없어 노래까지 부르며 췄다. "점쟁이 노파말이 맞았어, 그 약을 먹었더니 갑자기 용기가 솟아나고 배짱이 생겨 사랑에 성공했네, 럽 포션 넘버 나인!"
춤이 끝나자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물을 닦던 둘째 누나가, "너 그 춤 어디서 배웠니?" 해서 "상철이 형!" 했다. "노래도 걔한테 배웠어?" 해서 "어, 상철이 형!" 했다. 그날 저녁 상철이 형은 우리 둘째 누나에게 붙들려와 마당 한가운데 '키 빼기만 큰 놈'으로 선 채 엄청나게 혼났다. 애한테 그런 거나 가르친다고. 형도 뭐라 대꾸할만 한데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 푹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누나가 무서워서가 아닌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짝사랑 그녀가 뭐라는데 어찌하겠는가.
알고 보니 형이 내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만나는 동네 꼬마들에게 모두 춤을 가르치고, 빠다 볶음밥을 한 찻숟가락 줬단다. 어느 저녁 우리 꼬맹이들은 평소 아지트인 감리교회 마당에 모여서 형이 가르쳐준 춤을 췄다. 보이그룹처럼 칼군무는 아니었겠지만 '럽 포션 넘버 나인'을 합창하며 교회마당에 먼지가 폴폴 나도록 신나게 췄다. 목사님이 "이누무 새끼들!" 하며 쫓아내기 전까지는.
거룩한 주님의 집에서 쥐방울만한 것들이 모여 저속한 춤을 추며 그것도 모자라 입을 모아 "점쟁이 노파..." 어쩌구 하는 불경스런 가사의 노래를 불러대니 꼭 감리교 원리주의자 부시를 닮은 목사님의 눈엔 우리가 '악의 축'이거나 악마의 새끼들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저녁, 목사님도 욕을 한다는 걸 알고는 사람 겉만보고 판단하면 안된다는, '빠다복음'보다 귀한 지혜를 얻었다.
언젠가 단골 LP 바에서 그날의 '럽 포션 넘버 나인'을 신청했다. 취기도 적당하겠다, 손님도 별로 없겠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걸 참았다. 어린 시절엔 나도 개구쟁이였고, 잘 웃고, 잘 웃기기도 했는데 이제는 우스운 걸 봐도 우습지 않고, 누굴 웃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물며 남들 앞에서 춤을 추다니.
이따금 어린 시절의 엉뚱한 짓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마치 찌린내나고 춥기만 하던 동네 극장의 '70미리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처럼, 시절은 궁색하고 모질었지만 추억은 언제나 즐겁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시절 세상 모르던 천진난만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쩌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나 하는 자책이 뒤따른다.
11월 중순인데 벌써 추워져 타이즈 같은 내복을 꺼내 입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그 패션으로 식구들 앞에서 발레를 한다. "앵, 뒈, 트르와, 앵, 뒈, 트르와, 쩌어엄프!" 식구들이 우스워 죽는다. 아내가 한마디 한다.
"하여간, 네 아빠는 해마다 내복 입을 때 꼭 저러더라. 겨울이 오긴 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