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달리기에 빠졌을 때, 아침에 비가 내리면 이웃의 복도식 아파트에 들어가 꼭대기 층까지 오르내리며 복도를 달기도 했다. 뭐든 한 번 좋으면 그처럼 폭 빠지는 편인데, 계속 그러면 뭐가 돼도 됐겠지만 싫증도 잘 낸다. 좀 알겠다 싶으면 재미없다. 그러니 '뭐'가 될 일이 없다. 다행히 달리기는 20년을 하고 있으니 신기하다.
그렇게 달리기에 빠져 이른 새벽 한바탕 뛰고 나서 출근 버스에 앉으면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오며 잠이 쏟아진다. 다행히 집이 도심 외곽이어서 승객이 많지 않아 좌석을 차지하고 졸기에 딱 좋다. 버스 정류장에는 늘 비슷한 시각에 출근하는 낯익은 얼굴이 많다. 눈인사라도 나눌만한 매일 보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낯가림을 하는 것인지 선뜻 먼저 알은체 하는 사람은 없다.
버스가 도착하면 지정석처럼 늘 앉는 승차문 옆 두 번째 일인석. 그날도 꿈같은 졸음이 사르르 밀려와 차창에 슬쩍 기대어 눈을 감았다. 깜빡 졸음에도 어렴풋이 다 왔겠다 싶어 눈을 떴다.
"이번 정류장은 '반월당, 반월당'입니다"
이런! 한 정거장을 지나버렸다. 순간 번개보다 빠르게 스치는 생각.
절대 허둥지둥 내리면 안 된다. 내려서도 뒤 돌아오던 방향으로 걸어가면 안 된다. 앞으로 가야 한다. 안 그러면 평소 어디에서 내리는지 알고 있는 낯익은 사람들이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 졸았군."
아이고, 창피해! 이런 일이 생기다니. 속으로 얼마나 킥킥대며 웃을까. 뒷머리가 뜨뜻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점잖게 버스에서 내려 마치 그쪽에 볼 일이나 있는 양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면 버스 안의 낯익은 사람들도, "저 사람 오늘은 여기에 볼 일이 있나 보다" 할 것이다.
나는 결코 버스를 쳐다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보무도 당당히, 시선은 똑바로, 앞으로 걸었다. 내 생각처럼 "저 사람, 오늘은 여기에 볼 일이 있나 보다"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얼른 뒤돌아 꽁지 빠진 수탉처럼 오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리라, 내가 졸다가 정류장을 지난 것을. 아무도 모르리라, 내가 이토록 소심한 사내인 것을. 아무도 모르리라, 아무도 관심 없는데 혼자 생쑈를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