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1998.4.23

by 세인트

(30년 전 00일보에 연재한 칼럼 중 하나 입니다. 브런치에 남겨두기 위해 올립니다)


그날은 소풍날. 김밥에, 사이다에, 귀한 연양갱까지 미어져라 먹고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일 년 삼백육심오일 중 이 날만은, 이 시간만은, 적어도 얼굴 뽀얀 샌님들이나 엄마가 뻔질나게 학교에 드나드는 '알랑방구' 들의 시간이 아니었다.


지각대장 필중이, 싸움대장 용호, 머리에 서캐가 서말인 귀옥이, 이제 그들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재작년 가을에도 그랬고 작년 봄에도 그랬다. 확실히 그들은 타고난 재주꾼들이었다. 요즘 아이들처럼 며칠 전부터 조를 짜서 연습하는 법이 없다. 다만 그 시간이 돌아오면 마치 무당이 접신하듯 저절로 몸이 흔들고고 목소리가 변하고 자세히 보면 눈빛도 변한 걸 알 수있다.


'야전'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가 흘러나오고 귀옥이의 투스텝이 절정에 이를 때쯤이면 아이들은 이미 배가 다 꺼질 지경으로 웃어대지만, 정작 선생님들의 인기를 모으는 것은 단연 필중이의 '딜라일라'였다. 영어라고는 지게 놓고 'A'도 모를 필중이가 틀림없이 한글로 받아 적어 외웠을 그 노래는, 평소 새초롬히 눈을 깔고 다니던 교생 선생님들도 연실 "어머, 어머" 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그날만은 그들의 날이었다. 머리 속 서캐를 참깨 털듯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귀옥이도 그날만은 '서캐 서말'이 아니었으며, 필중이도 지각대장이 아니라 ㅇㅇ국민학교 톰 존스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 중 누구도 가수나 배우가 되지 않았다. 하나는 공무원이 됐고 하나는 부동산을 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 신명들을 다 어쩌고 살까.


그렇다, 그날은 소풍날이기 때문이었다. 일탈은 '그날만'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나머지 모든 날들은 그날 하루의 해방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음날부터 그들은 다시 지각대장이 되고, 싸움꾼이 되고 '서캐 서말'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온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벌을 서고, 손바닥을 맞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평소의 그들은 그저 말썽꾼이고, 차림이 더러워 놀아주는 친구 하나 없는 아이였을 뿐이다. 매일이 소풍이 아닌 다음에야. 그들에게 웃어주고 박수 쳐주는 건 오직 단 하루, 소풍날, 그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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