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엄마가 식당을 하셨다. 말이 식당이지 손님이 오면 방 비워주느라 누나들은 우르르 이웃집이나 친구집으로 쫓겨나고, 나와 내 동생은 골목에서 아이들 불러 모아 딱지치기나 자치기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 만큼 '콧구녕' 만한 집이었다.
손님이 오면 엄마는 폭 꺼진 부엌에 내려가 철근을 두드려 만든 긴 갈고리로 안방이나 애들 방 바닥 아래 밀어 넣었던 내로식 연탄을 끄집어내 반찬을 만들었다. 너무 오래 꺼내면 방이 춥고, 그렇다고 안 꺼내면 요리를 할 수 없고. 한겨울에 요리한다고 연탄을 오래 꺼내면 누나들과 나는 연탄 좀 빼지 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엄마는 "이누무 자손들, 묵고 살라믄 참아야지 쫌 추분기 문제가?" 하셨다.
정치하다 망하신 아버지 때문에 평생 가족의 생계를 엄마의 조그만 몽땅손으로 해결했다. 식당을 하면 그래도 자식들 밥은 굶기지 않겠다 싶어 시작하셨다고 했다. 덕분에 가난해도 밥을 굶은 기억은 거의 없다. 하다못해 시래기 죽이나, 너무 질려 지금도 먹지 않는, 갱식이라 부르던 시큼한 개죽같은 음식이라도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으니, 아버지는 많이 배운 무능력자고 엄마는 배운 것 없는 유능력자였다.
요즘 식당처럼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손님이 원하는 음식을 그때그때 만들어 팔았다. 가끔 돈 많은 사람이 돼지고기나 족발 같은 것을 시키면 구수한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진다. 온 동네에 퍼진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고기 냄새를 담아보지 못한 가난한 공기는 조그만 냄새도 금세 실어 나른다. 그런 날은 어김 없이 동네 애들이 나를 부른다. "정호야 노올자아!, 정호야 노올자아!" 합창을 한다. 그러면 엄마는 기름이 둥둥 뜨는 돼지고기 삶은 물 한 바가지에 왕소금을 툭툭 뿌려 내게 주신다. "가가가 아들이랑 무라"
내가 아니라 돼지국물을 기대하며 문밖에 목 빼고 기다리는 아이들 줄을 세운다. 사실 줄은 이미 서있다. 언제나 다람쥐처럼 잽싼 종우가 일등, 그리고 현수, 춘웅이, 상식이가 그날의 순서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은 늘 굼뜬 남진이다. 종우가 내게서 건네받은 돼지국물을 한 모금 마신뒤 뒤로 돌려 차례로 남진이까지 전달한다. 그래도 중간에 욕심을 내 두 모금 마시는 아이가 없어 맨 끝의 남진이는 거의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쪽쪽 빨아먹더라도 모자라는 일은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중간에 춘웅이가 벌컥벌컥 마시는 바람에 남진이 몫이 부족한 일이 있는데, 벌칙으로 한동안 춘웅이를 돼지국물 순번에 끼워주지 않았다. "넌 인마, 오늘부터 국물 없어!" 나의 이 선언에 눈물보다 콧물을 더 풍부하게 흘리던 막내 춘웅이 얼굴이 생생하다.
돼지국물 한 바가지를 다 비우고 나면 속이 뜨뜻해진 우리들은 동네를 돌며 큰 소리로 합창했다.
"엄마야, 뒷집에 돼지국물 삶더라 / 쫌 주더냐, 안 주더냐 / 찌린내 짜린 내 나더라!"
아마도 돼지국물 못 얻어먹은 애가 만든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후 '딱 한 모금'의 규칙은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고, 새마을 운동 때문인지 '둘만 낳아 잘 살자' 때문인지 나라도 잘 살게 되고, 우리 집도 식당을 그만두게 되고, 그런 것들이 순서와 관계없이 뒤섞여 더 이상 돼지국물 영성체를 하지 않게 될 때까지 잘 지켜졌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내 아이들에게 하면, 조선시대였어? 하고 놀란다. 다들 가난했고, 어느 동네나 아이들이 많았고, 군것질 거리는 귀하고, 혹시 누구네 집에 좋은 일이 있어 돼지고기라도 삶으면 동네가 다 알게 되고. 가끔 누군가 "국물도 없어"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이 내겐 모진 선언이 아니라 정겹게 들린다. 건더기는 말할 것도 없고, 국물도 한 방울 남겨주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그렇더라도 국물이라는 단어는 그런 야멸찬 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홀짝홀짝 스푼으로 떠먹는 수프는 비교할 수 없는 들이킴의 시원함, 뜨끈함, 그리고 어린 시절 돼지국물처럼 구수한. 건더기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넉넉히 부어 나눠마시는, 그런 게 국물의 본질이 아닐까. 그러니 '국물을 훌훌 나눠 마시고 나서야 잔치가 끝나는' 것이 아니겠나. 아무리 사납게 "국물도 없어!" 해봐야 국물은 언제나 홀로 넉넉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