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화성의 충돌: 흔들리며 아름다워지는 법
5장. Blue Note- 슬픔과 기쁨 사이
재즈를 듣다 보면 분명 단조(Minor)의 슬픈 곡조인데도 어깨가 들썩이고, 반대로 경쾌한 메이저 곡임에도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 모순적인 감정의 중심에는 '블루 노트(Blue Note)'가 있다. 서양 음악의 표준인 12 음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음, 온음과 반음 사이의 좁은 틈새에 끼어 있는 이 미묘한 음정은 재즈에 특유의 푸른빛 우울함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블루 노트는 메이저 스케일에서 3도, 5도, 7도 음을 의도적으로 반음 낮추어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안개처럼 모호한 느낌의 선율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바닥으로부터 살짝 뜬 채 부유하는듯한 느낌의 이 음들은, 듣는 이에게 '안전한 화음'이 주는 편안함 대신, 살짝 긴장감을 만들어준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명확한 상태를 요구한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게 선명한 원색으로만 칠해지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뒤 찾아오는 슬픔 속에서도 문득 맛있는 음식 앞에 입맛이 도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혹은 꿈꾸던 목표를 이룬 성취의 정점에서 이유 모를 허무함을 느낄 때, 우리는 인생의 정교한 12 음계 밖으로 삐져나온 블루 노트를 연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 미묘한 음정은 불협화음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곡을 가장 풍성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만약 우리의 삶이 오직 밝고 깨끗한 장조의 화음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삶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오히려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린 작은 기쁨, 실패의 쓴맛 뒤에 찾아오는 담담한 수용,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긍정할 때 느껴지는 서글픈 평온함. 이런 비정형의 감정들이야말로 한 인간의 내면을 깊고 단단하게 빚어내는 것이 아닌가.
재즈 연주자들이 블루 노트를 사용할 때 그 코드가 몽롱하다 해서 결코 흐릿하게 소리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호한 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우리 역시 삶의 우울(Blue)을 대할 때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 삶에 찾아온 슬픔을 단순히 '불행'이라는 단어로 퉁치고 서둘러 지워버리려 애쓰기보다, 그 슬픔이 정확히 어떤 농도를 띠고 있는지, 나의 기쁨과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면. 내 삶의 불협화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할 때, 비로소 그 슬픔은 나만의 선율로 승화되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블루 노트가 해결(Resolution)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미묘하게 낮춰진 음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니며,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에 청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고 삶의 한 조각으로 인정하며 채우는 과정이 음악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이 어딘가 비틀려 있고, 남들의 정갈한 화음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내가 연주하는 그 '블루지한' 소리는 결코 틀린 음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깊은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결국 좋은 재즈 연주자는 블루 노트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인생이라는 긴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매끄러운 행복만을 좇는 이보다,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우울과 불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만의 매력적인 음색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삶이란 어차피 매끄러운 행복만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 나의 하루에 예상치 못한 슬픔이나 당혹스러운 감정이 끼어들었다면, 그것을 삶의 불청객이라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대신 그 음을 지그시 눌러보자. 그 미묘한 떨림과 굴절을 타고 흐르는 선율 속에서,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인생의 진짜 매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슬픔은 기쁨의 반대말이 아니라, 기쁨을 더 기쁨답게 만드는 인생의 아름다운 불협화음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은 있어도 '즐겁도록 아름다운'은 없다.(수필/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