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떠올린 단어라서 사전에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눈의 물’을 한자어로 ‘雪水(설수)’로 지어본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있었다. “눈이 녹아서 된 물”이라는 뜻과 함께.
새벽 네 시 너머 물류센터 퇴근길. 5일(토요일)엔 싸라기눈, 6일(일요일)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건물 옥상 주차장에서 셔틀버스에 오르기 전, 그 함박눈을 부러 올려다보며 맞았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 구절.
밤하늘의 굵은 함박눈. 바람도 잔잔한 날, 캄캄한 배경을 뒤로 하고 하얀 눈들이 내 얼굴로 내려왔다. 뚫어져 보느라 내 시야는 원통형이 되었고 그 안의 함박눈 눈송이들은 뚜렷한 원근감으로 떨어졌다. 황홀했다. 만약 안경을 벗었다면 눈[眼]과 눈[雪]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사전에서는 눈물[雪水]의 ‘눈’을 생리적 눈물의 ‘눈’보다 길게 발음해 동음이의어를 구별하게끔 해놓았다. 사전을 통해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며칠 전 동생이 덕유산 정상의 상고대 사진을 보내왔는데, 이 상고대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서리 상(霜)’ 자가 들어갔으리라 여겼는데, “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라는 뜻의 상고대는 17세기 ‘산고□’[‘브런치’상에 훈민정음 때 고어가 입력이 안 돼 풀어 덧붙인다. □=산고+ㄷ+아래아(·)+l]에서 변형된 단어였던 것이다. ‘눈송이’의 한자어도 있다. ‘설화(雪花)’가 그것인데 정확히 “굵게 엉기어 꽃송이처럼 내리는 눈”이라는 뜻을 지닌다. 한자어 찾기 놀이는 늘 흥미롭다.
짙은 함박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버스에 오른 뒤 얼마 후 그쳤다. 그런데 눈은 아직 살아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의 창에는 비가 내릴 때처럼 올챙이 떼가 사선으로 비껴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 지붕의 눈이 물로 변해 하강하는 중이다. 이 글의 제목은 이 장면을 보고 나서 떠올렸다.
<눈의 꽃>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원제목은 <雪の華(유키노 하나)>. ‘의(の)’를 살린 제목이다. 줄여서 ‘눈꽃’이라 번역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면 뭔가 아련한 뉘앙스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눈물[雪水]’을 ‘눈의 물’이라 부르면 어떨까. ‘눈의 물’이라는 표현엔 고체 상태의 눈과 액체 상태의 물이 동시에 담겨 있고, 눈이 물이 되는 시간적 뉘앙스도 들어 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과 차별화할 수 있고.
순수한 물의 어는점과 순수한 얼음의 녹는점은 똑같이 섭씨 0도이다. 눈도 일종의 얼음 결정체다. 우리 마음도 액체 상태일 때가 있고 고체 상태일 때가 있다. 심지어 기체 상태도 있다. 평정심일 때(액체), 굳어지거나 시무룩할 때(고체), 들뜨거나 화가 날 때(기체)가 그러하다. 하루 중 마음은 일정할 수가 없어 어는점, 녹는점, 끓는점을 수없이 오고 간다.
이 겨울날 눈 올 때, 장음의 눈물(눈∼물) 또는 ‘눈의 물’을 발음하거나 떠올려보면 어떨까. 눈을 맞으며 물에 젖으며, 입 밖으로 김을 내뿜으며 우리는 다중 상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채면 어떨까. 다채로움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상태인 건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