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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와인

by 박태신

샛별(금성)을 보았다. 11일 여명의 시간에. 다이아몬드처럼 하얗게 빛났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른 행성이나 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샛별은 새벽에 뜨는 새벽별이 아니다. 밤새 보일 때도 많다. 지구와 금성의 공전주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운 좋게 샛별이 잠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때가 요즘임을 알았다.

사전을 보니 샛별의 ‘새’(사이시옷 빼고)는 ‘동쪽’이라는 뜻과 ‘흰(白)’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나온다. 그래서 샛바람은 동풍을 일컫는다. ‘동쪽하늘 흰 빛’ 금성의 별칭인 샛별이 제 이름값을 한다.

어제 오후엔 하얗디하얀 대형 뭉게구름이 기세를 높이는 장관을 보았다. 풍성한 흰색 수국을 한데 묶은 대형 꽃바구니 같다. 그 구름 위로 도포 자락 같은 상층운이 펼쳐져 있고.

요즘 은색의 자전거 그림이 라벨에 박혀 있는 와인을 마셨다. 경주용이 아닌 수수한 일반 자전거. 그래도 튼튼해 보인다. 와인 이름도 스페인어로 ‘Bicicleta(자전거)’이다. 네이버 스페인어 사전에서는 ‘비씨클레타’, ‘비키클레타’라고 발음이 혼용돼 들린다. 아무튼 ‘자전거 와인’. 마트에서, 9900원이라는 할인된 가격이 눈에 띄어 구입했는데 그 맛에 반해 또 찾았다.

그런데 자전거 그림 밑에 흰색으로 “Follow your Road”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너와 함께 갈게’ 정도로 번역하고 싶다. 자전거가 나에게 와인 한 잔 권하며 다짐하는 말.


영화 <소울메이트> 스틸컷


영화 <소울메이트>가 생각났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 미소와 하은이 평생 우정을 나누고 상대를 책임져 주고, 귀걸이와 초상화로 그 흔적을 남기는 이야기.


자전거 와인을 마시며 나는 나, 자전거는 ‘나’로 지칭해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나는 ‘나’와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달리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고 짐도 실어주고 시간도 절약해 주고 운동도 하게 해주는 존재다. 나의 목적지를 따라가 주고 어두운 곳에서는 라이트도 켜주는 나의 지지자, 소울메이트.

Ⓒ 다산책방

그래서 자전거 ‘나’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의 킨셀라 부부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어머니의 출산 때문에 여름 한 시절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다. 나에게 무관심하기 일쑤인 부모와 달리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를 성장하게 해주는 존재다. 결코 나를 탓하지 않고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 나의 눈높이에 맞춰 말을 건넨다.


혼자 걸어갔으면 겪지 못했을 경험들을 자전거를 타면서, 든든한 누군가와 함께 하면서 맛보게 됐다고 할까. ‘맡겨진’ 덕분에 나는 요리, 청소, 우물물 긷기, 달리기, 혼자 물건 고르기, 바닷가 산책을 한다. 그리고 침묵할 때를 배운다. 자전거와, 킨셀라 부부라는 ‘나’에게 맡겨진 덕분에.


열쇠를 보관하는 기능 대신 액세서리 기능으로 많이들 지니는 키링. 젊은이들 배낭엔 다양한 모양의 키링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키링을 달고 다닐 때가 잠시 있었다. 문득 자전거 모양의 키링을 구해보고 싶어졌다. 검색을 해서 주문할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자전거 와인을 마신 덕분이다. 나는 ‘나’를 상징하고 나의 배낭에 달려 나와 함께 할 자전거 키링을 찾기로 했다. 배송 주문이 아니라, 가끔씩 키링을 파는 가게나 매장을 발품 팔아 기웃거리기로. 이왕이면 흰색이나 은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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