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by 박태신

안경테 한가운데가 뚝 부러졌다. 수건으로 알을 닦으려고 안경을 집다가 힘을 세게 준 것 같다. 글 쓰러 카페 갈 채비를 다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요즘 마음챙김에 관한 책을 읽던 중이어서 그런지 낭패가 짜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헛웃음 한 번 나왔다. 극단적으로 책은 나에게도 죽음이 닥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무엇(크든 작든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이 두렵겠는가 한다.


카페 가기 전에 20년도 더 된 단골 안경점에 들를 수밖에 없었다. 소나기가 내렸다. 더운 날씨에 고마운 비다. 그렇긴 한데 저기 학교 파하고서 나온 초등학생 남자 네 명이 손우산 만들며 가고 있다.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고 권하고 잠시 서로 웃으며 같이 걸었다.


지하철을 탔다. 우산을 추스르다 날파리 닮은 곤충 한 마리가 손가락을 타고 있는 게 보였다. 소나기 피하다 내 손에 묻어왔나 보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손등을 느릿느릿 기어간다. 가까이 눈 대고 보니 한쪽 날개가 꺾여 있었다. 난감했지만 데려가기로 했다. 도착지 지하철역에 내린 다음 나무줄기에 얹혀 주었다.


여러 해 내 안경을 맡아준 직원이 내 안경알에 맞는 테를 찾아 나섰다. 워낙 싸고 오래된 모델이라 진열장에 없어 사물함 박스까지 꺼내 뒤적였다. 그리고 딱 하나 찾아냈다. 아쉽게도 책 읽거나 노트북 작업할 때 쓰는 안경의 테와 같은 색이었다. 수시로 안경 두 개를 교대로 쓰는 나로서는 망설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직원은 금세 부러진 안경테에서 알을 꺼내 새 안경테에 끼워 넣었다. “예전 안경테는 버릴 게요.” 물론 그래야지. 그런데 몇 년을 나와 동고동락한 안경테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가지고 갈게요.” 가방에 넣고 나왔다. 아무래도 내 방에 오래 있을 것 같다.


지난 4월 산책 때가 생각났다. 한 주 동안 혜민 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을 음미하며 읽었다. 부유하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음이 지치면 핸드폰을 잠수시키고 술을 마셨다. 혜민 스님 책을 구입한 그 다음날 산 분홍색 펜으로 연신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책을 들고 발품을 팔아 마음이 동하는 곳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벤치에 앉아 산책하며 생각난 것들을 수첩에 메모하다가 그 분홍색 펜을 벤치 위 나무 널과 널 틈 사이에 빠뜨리고 말았다. 같이 가져간 검은색 볼펜의 볼펜심으로 꺼내려 시도했다가 오히려 더 깊숙한 곳으로 내몰고 말았다. 도저히 뺄 수 없게 돼버렸다. 혜민 스님의 책을 그날 다 읽었는데, 분홍색 펜은 그렇게 소명을 다하고 떠났다. 미련이 남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젓했던 어느 봄날의 상실이었다.


혹시 내 안경테도 소명을 다하고 부러진 것은 아닐까. 내 코언저리에 걸터앉고 오랜 기간 나를 돕다가 노쇠해 허리가 끊어진 것은 아닐까.


50대가 되면서 눈은 점점 더 침침해지고 가는귀가 먹고 기억력도 떨어졌다. 지인이 그랬다. 나이 들면 덜 보이고 덜 들리는 등 둔감해져야 살기 편해진다고. 떨어진 감각 덕분에 몸이 덜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렇단다. 무릎을 쳤는데 생각해 보니 이미 나는 그런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까짓것, 지금의 감각 능력으로 할 것 하면서 살면 되지. 그래도 상실은 상실이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을 같이 탄 그 곤충도 날개 하나 기능을 상실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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