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너머, 번역 원고를 송고하고 바로 채비를 했다. 씻고 옷을 입고 가방을 쌌다. 방안은 난장판.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먹고 씻는 등 꼭 필요한 일만 하고 원고에만 집중하게 된다. 청소도 설거지도 안 한다. 발 디들 틈이 없을 정도로 잡동사니가 널브러지게 마련이다.
6개월 넘게 방안에서 문서 번역 일에 매달렸다. 7~8개 문서를 차례차례 보내고 이날 마지막 원고를 보냈다. 이젠 방에서 나가야 한다.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난장판을 팽개치고 터미널로 직행, 또 다시 정선행 고속버스를 탔다.
작년에 갔던 가리왕산 중턱의 ‘제한구역서비스’ 지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제 브런치 글 20회 ‘제한구역서비스’ 참고). 핸드폰이 송수신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 나무다리도, 나무다리 건너 내가 걸터앉은 돌 기단도 그대로였다. 하늘 위 잎그림자들을 올려다보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작년 이맘때처럼.
1미터쯤 앞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벌레다. 오메가(Ω) 형 몸놀림으로 아주 느리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안경 벗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역시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루운동에서 체조선수가 머리를 앞쪽으로 또는 뒤쪽으로 발끝까지 동그랗게 굽히는 몸짓을 보는 것처럼 온몸이 유연하기 이를 데 없는 곤충. 머리를 치켜세우면 기린 같아 보인다.
가지고 온 명상 책을 들췄다. 번역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급하게 주문한 책.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명상들을 담은 책. 그걸 ‘제한구역서비스’에서 잠시 들췄다. 너와집의 너와처럼 지붕이 돼준 키 큰 나무들의 포개진 잎들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 마시며, 건너온 나무다리 바라보며 쉰다. 다시 자벌레를 찾아보았는데 온데간데없다.
이제 내려갈 시간.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는데 오른쪽 운동화 맨 앞쪽에 무언가가 묻어 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것이 운동화 맨 앞 가죽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잡아떼려 했는데 안 떨어진다. 설마 하고 앉아 자세히 바라보니! 세상에 그 자벌레였다. 그 자벌레가 나라는 새로운 존재가 숲속에 등장하자 다가온 것이다. 어느 새 내 운동화 위로 올라와 뒷다리로 몸을 지탱한 다음 일자로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을 지켜보기나 하듯이. 그것도 모르고 힘껏 그 긴 목을 잡아당겼으니……
미안했다. 운동화를 벗고 눈가에 가까이 대고 보았다. 한 쌍의 뒷다리로 억세게 내 운동화를 붙잡고 꼿꼿하게 서 있는 그 힘이 놀라웠다. 예전 사마귀를 만났을 때처럼 내 손을 갖다 댔다. 내 손바닥으로 기어 올라오길 기대하며……그런데 요지부동이다. 일자로 선 채 바람에 흔들거리기만 했다. 내가 목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 죽은 것일까? 아니면 기절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운동화를 벗어 바위 위 이끼 위에 갔다댔다. 반응이 없다. 혹시나 싶어 다시 손바닥에 대보았다. 역시 반응이 없다. 할 수 없어 거의 체념한 채로 다시 이끼 위에 자벌레 머리를 가까이 댔다. 그랬더니 인기척 아니 ‘곤충기척’을 내기 시작했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살피고서는 천천히 이끼 위로 내려앉은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내 바위 위를 기어가는데 호기심에 내 손을 다시 갔다대니 피한다. 조금 전 나의 ‘만행’에 질렸을 터……
생존본능으로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살기 위해 죽은 척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마음이 무겁지 않게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곤충을 신기한 대상으로 생각하기에 잘 죽이지 못한다. 내 방에 들어온 모기는 전자모기향의 힘을 빌린다. 가끔 평심 상태에서 그러긴 했지만, 마음속이 스트레스로 가득할 때는 절대로 손 내리쳐 죽이지 못한다. 분노로 살생하는 것 같아서……이렇게 내가 가까이 만난, 그래서 브런치 글로도 표현했던 미물들 송충이, 달팽이, 사마귀에 자벌레가 보태졌다.
생존본능. 정선 읍내에서 수없이 본 제비들이 뱀이 없다는 이유로 겁도 없이 민가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는 본능처럼 그리고 침입자를 합심해 쫓아내는 본능처럼 자벌레도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삶이 무서울 땐 움츠려도 된다. 움츠리면 에너지도 보존된다. 자기 보호 본능이다. 상황이 그럴 땐 잔뜩 기죽어도 된다. 그래야 살기에. ‘죽은 기’는 두려움의 순간이 지나면 ‘산 기’가 될 것이다. 그런 흔적이 마디마디가 되어 사람의 삶을 형성해온 것일 게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진다. 정선 5일장 시장 가서 작년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 두부 짜글이찌개를 먹으러 갈 생각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