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타는 달팽이

by 박태신
P1040711.jpg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에서의 일이다. 종로구청이 관리하고 있는데, 건축상을 받았을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지어졌다. 2013년 그곳에서 달팽이를 만났다.


이곳 제2전시실은 일제시대 때 지어진 물탱크를 그대로 보전하면서 천장을 오픈해 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바닥에다 자갈을 깔고 수풀을 심어 놓아 달팽이도 존재할 수 있었다.


P1040713.jpg

정말로 느린 걸음걸이였다. 내 키보다 조금 더 높이 벽을 타고 있었는데 그 높이까지 기어가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싶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갔을 테니 기나긴 여정이었겠다. 역설적이게도 그 당시 영화관에서는 경주용 자동차보다 빠른 달팽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애니메이션(<터보>)이 상영되고 있었다.


우연찮게 발견한 달팽이를 혼자 보기 아까워 근처에 있던 학생들에게도 알려주었더니, "대박이다!"라는 찬사가 나왔다. 그럴 만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도 알려주었더니,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달팽이를 수 풀가에 옮겨놓아주었으면 했다. 그 직원이 키가 조금 작았다.


P1040720.jpg

손가락으로 딱딱한 달팽이 등을 집어 떼어내려 했더니, 완강하게 붙어 있어 떨어지지 않는다. 잠깐 고민하다가 지갑에 넣고 다니던 카드형 USB를 꺼내 갖다 댔다. 영문을 알았는지 달팽이는 USB 위로 올라탔다. 수풀가로 가서 USB를 바닥에 댔다. 억지로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달팽이는 더듬이 눈으로 좌우를 살피더니 이내 자갈 위로 자리를 옮겼다. 뿌듯했다.


20190524_130405.jpg

얼마 전까지도 마음이 부산할 때 한두 꼭지씩 읽곤 했던 시인 문태준의 산문집 『느림보 마음』 표지에도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다. 2010년 초판본을 샀는데 분실해 다시 샀고 내용이 추가된 개정판도 샀다. <오마이뉴스>에 서평도 썼다.


느림보인 달팽이를 본받으려 그랬는지, 정말 차분한 삶을 살아가게끔 시인은 달팽이의 속성을 책에 오롯이 담았다. '시원하고 푸른 한 바가지 우물물 같은 휴식' 편을 읽어보시라.


“나무가 그늘을 만들듯이, 거실이 한쪽에 소파를 두듯이, 우리의 삶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은 땡볕 같은 날에 내리는 한차례의 소낙비 같은 것이다. 뒤틀린 것을 천천히 원래 자리로 되돌려 주는 것이 휴식이다. 우물물로 등목을 하듯, 갈증의 마음에 시원하고 푸른 한 바가지의 휴식을 주어야 한다.”


지금 내 『느림보 마음』은 우물물이 아니라 생수병 물을 잔뜩 먹어 두툼해졌고 화상 입은 듯한 생채기를 지니고 있다. 주인장이 몹쓸 짓을 했다. 이 책은 앞으로도 쭉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표지의 달팽이가 녹색임을 새삼 알아차렸다. 다가올 녹색 피서철에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다. 시인이 여름의 기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