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김승옥의 <무진기행> 중에서)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지는 순천이다. 김승옥 작가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다. 상상으로 지은 이름 ‘무진’(霧津)을 풀이하면 ‘안개가 가득한 나루터’라고 할 수 있겠다. 순천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꼭 작년 이맘때 순천으로 ‘김승옥 문학기행’을 갔다 왔다. 지난번 글 ‘딴짓 딴생각’에 이어 남도 여행을 소개한다. 참석자들끼리 작가와 작품을 논하기는 했지만, 이 글의 목적은 순천의 가을 풍경을 잠시 소개하는 것이다.
전세 버스 안에서는 나눔이 가득했다. 여러 사람이 가져온 모양에 걸맞은 이름의 호박고구마와 사과대추, 가래떡과 호두과자 등이 오고 갔다. 뜻밖에도 술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과 입은 풍요로웠는데, 남도를 향할수록 창밖으로 안개가 끼고 비가 오는 모습이 불안스레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먹구름은 흰구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여러 갈래 분산돼 내리쬐는 ‘틴들현상’을 일몰 때까지 두고두고 볼 수 있었다. 노을도 구름이 있어야 제멋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땡볕은 ‘무진기행’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구름 덕을 톡톡히 보았다.
먼저 ‘순천만국가정원’을 유람했다. 막막할 정도로 넓은 정원들 속에서 다들 동심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꽃밭을 거닐고 사진을 찍었다. 동행 중 몇 사람은 자기들도 꽃이라고 사진을 찍는 내게 (아니 내 핸드폰에) 벙싯 웃어댔다.
그러다 나는 길을 잃었다. 안개가 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릴 적 창경원(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에서 잠시 미아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꼴이었다. 일행을 찾다가 포기하고 혼자 거닐기로 했다. 덕분에 신비의 세계를 맛보았다. 아담한 일본식 정원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인 단풍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푸르던 붉던 5~7갈래의 단풍잎들이 내겐 특별한 존재로 보인다. 반면 웅장해 보이는 이탈리아 정원도 각별했다. 고유 양식의 성채와 식물 담장이 조화롭게 세워져 있었다. 성을 들어서서 회랑 모형의 사각 테두리 정원을 돌았다.
황홀한 꽃밭을 발견했다. 멀리서도 도드라져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분홍색 안개가 바닥에 깔려 있는 듯했다. 지금은 흔한 것이 돼버렸지만 그때 처음 본 ‘핑크뮬리’라고 하는 벼과의 식물이다. 이름 어원이 ‘머리카락 같은’이다. 그런 까닭에 손에 쥘 수 없을 것 같은 흐리고 아련한 형색이다. 운 좋게 만난 노랑나비만이 튀는 색깔로 꽃밭을 분별력 있게 누리고 있었다.
스카이큐브를 타고 습지로 날아갔다. 종착역에 내려 순천만 갈대밭까지 걸어가면서 억새도 많이 만났다. 기다란 흰색 이삭이 멋진 자태를 뽐낸다. 잎이 억세다. 그래서 그런지 일행 중 한 명이 녹음해 들려준 순천만의 바람소리 중 억새 소리가 거셌던 것 같다. 갈대는 갈색이고 대나무를 닮아서 이름이 그렇단다. 드넓은 갈대밭 나무다리를 지그재그 지나 용산 전망대를 향했다.
다들 순천만의 멋진 일몰 풍광을 즐겼다. 일찍 올라가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게 정석인데 우리가 그렇게 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을 전망대에서 보냈다. 다들 일몰 사진을 훌륭하게 찍어서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저녁으로, 여간해서 타지에서는 맛보기 힘든 통 짱뚱어탕을 먹었다. 짱뚱어가 생긴 그대로 뚝배기에 담겨 있고 자신이 살던 습지 바닥처럼 진흙색이어서 생경했는데, 그런 만큼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숙소에서 한 선배의 진행으로 이야기 나눔 시간을 가졌다. 김승옥 작가에게 무진은 힘들 때 돌아가고픈 고향 같은 곳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일행들은 진솔하게 자기만의 무진을 표현했는데 그 다양한 소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받아 적은 내용들은 이랬다.
“무진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무진은 과거의 나와 같이 걷는 시간.”
“가족이 가장 큰 무진, 안식처다.”
“내게 무진은 책! 하느님!”
“목적지가 있으면 안개가 있어도 두렵지 않을 것.”
“소소한 모든 것이 무진일 수 있다.”
“안갯속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이 무진.”
“안개는 카타르시스의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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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북엇국을 먹고 ‘도솔 갤러리’라는 카페를 점령했다. 나는 애음(愛飮)하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시큼한 맛이었다. 국화차도 얻어 마셨다. 아래층 갤러리에는 세월 묵은 전통 가구와 현대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정원 뜰에 심은 감나무의 까치밥은 까치가 아닌 손가락 길이의 작은 새가 차지한다. 누런 논에서는 콤바인이 벼를 베고 있다. 모두 ‘안개가 걷힌’ 무진에서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일행 한 사람의 외투에 입혀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Like a bird you set the free”. 새처럼 자유로워져라는 말일까? 아무튼 김승옥 문학관을 향해 걸으면서 대화 나누고 사진 찍는 시간은 좀 더 자유로웠다. 그러다 지각을 하고 말았다.
순천만의 일몰 구경이 이번 기행의 압권이었는데, 해는 자신을 긴하게 바라봐 준 우리가 고마운지 상경하는 우리 버스를 따라왔다. 그런데 먹구름이 심술이 났는지 이내 봇물을 터뜨렸다. 거센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도 동반했다. 창문에 안착해 흘러내리는 빗방울 모습이 송사리 헤엄치는 모양새다. 그러다 먹구름은 해에게 길을 양보했고 덕분에 우리는 서울에 도착할 즈음 또 다른 일몰을 만났다. 기행의 끝물이다.
숙소에서의 바닷물 내음 수돗물 때문인지 기행 후 다음날에도 기행의 여운처럼 입에 소금기가 머물렀다. 여운이 가실 무렵, 여운을 되살렸다. 그렇게 시월의 마지막 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추억하는 글을 썼더랬다. 올 가을에도 무진의 모습은 여전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