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댁

by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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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였다. 늦은 가을 말이다. 사전엔 주로 음력 9월을 이른다고 나와 있다. 2020년 11월 14일 지인들과 함께 이 사전의 의미에 꼭 들어맞게 하루를 보냈는데, 이날이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골목을 누비고 다닌 서촌 일대는 2000년 초 내가 한옥을 감상하기 위해 골목을 누볐던 곳이다. 가회동 북촌이 양반집 한옥이 가득한 곳이라면, 개발 붐이 있기 전 서촌의 한옥은 서민들의 한옥이 참 많았던 동네였다. 필운동, 체부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이 서촌을 이루었다. 한옥이 카페와 현대식 건물에 자리를 내놓아 식상해하곤 했는데, 다시 들른 그 골목에서 겨울을 대비한 듯 집주인이 비닐 천막을 쳐 작은 온실이 된 풍경을 보았다. 그 안의 화초들이 화분 하나씩 꿰차고서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서민들의 한옥을 연상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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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이후 참 많이도 들락거렸고 지금도 내 지갑에 회원증이 있는 종로도서관을 거쳐 그 뒤 황학정에 갔다. 다시 들른 이곳 공중으로 현대판 궁수들이 살생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쏘아댄 화살들이 전용 케이블카에 실려 옮겨지고 있었다. 왜 그런지 이날따라 뾰족한 화살이 섬뜩하게 느껴져 국궁전시관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나무를 비롯한 초목들을 살펴보았다. 많이도 심어 놓은 대나무밭 가장자리를, 죽어 누렇게 변색되고 다듬어진 대나무가 울타리로 이용되고 있었다. 아! 전시관 앞에 화살나무를 발견했는데, 문득 머릿속에 이곳의 대명사인 ‘화살’이 오버랩돼 죽이 맞게 심어놨구나 생각이 들었다. 잠깐 밖에 나온 가이드 분에게 이런 뜻으로 화살나무를 심어놨네요 하고 말을 건넸더니 화살나무가 약으로 쓰인다고 다소 빗나간 화살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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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부동 골목에 있는 ‘홍건익 가옥’을 들렀다. 서울시에서 주관한 ‘옷대 탐방’ 프로젝트의 한 장소다. ‘옷대’란 예전 청계천 상류지역이었던 인왕산 기슭[上村]을 일컫는다. 이곳의 유서 깊은 건물을 둘러보도록 기획한 것이 ‘옷대 탐방’이고 여기엔 ‘사직단’, ‘이상의 집’도 포함돼 있다. 기회 되면 꼭 가보라 내가 권하는 ‘박노수 가옥’(미술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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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옛 풍경의 한옥이 마음에 들었다. 댓돌, 안채 뒤쪽 기다란 쪽마루를 통으로 막아놓은 유리 미닫이문들, 고동색 빗물받이 홈통과 운치 있게 물길 도우미가 돼준 기와 석 장, 우물이 보이는 안채 뒤 뜨락, 후원 앞 세련된 나무 의자 삼형제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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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랑채 제일 안쪽에 방바닥보다 한 보 높게 조성해놓은 마루 공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만의 공간인양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봤다. 홍건익은 양반이 아니라 중인이었다고 하는데, 책을 가까이 한 사람이라고 상상해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동행인이 어릴 적 시골집 이야기를 했다. 지금 자신의 시골집은 재건축해 놓았지만 어머니, 아버지와 셋이 잠자던 사랑채는 그대로 남겼다 했다. 잠시 같이 어릴 적 시골집 방이 풍기던 정겨운 냄새를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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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익 가옥 내 후원 너머 뒷집 지붕에 은행나무 단풍잎이 잔잔하고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후원 담장 위에는 마치 일부러 올려놓은 것같이 은행잎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바람과 은행잎이라는 자연이 만든 풍경이니, 은행잎이 노란색을 잃고 으스러질 때까지 그냥 그대로 놓여 있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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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타고 있는 어느 식물의 덩굴 줄기와 가지다. 덩굴이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이 덩굴의 모양새는 특이하다. 아래 줄기 끝을 보라. 땅바닥과 떨어져 끊겨 있다. 내 생각에 이 덩굴의 뿌리는 담 뒤쪽 땅바닥에 있는 것이다. 벽을 타고 맨 위까지 기어올랐다가 반대편 벽으로 기어내려 온 거고. 그런데 모양새가 꼭 후원 땅바닥에서 자라 위로 뻗어 올라간 것 같은 착시감을 갖게 만든다. 내가 잘못 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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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풍경을 즐기러 나온 사람을 상춘객(賞春客)이라고 한다. 이날 우리는 상춘객이 아니라 ‘상추객(賞秋客)’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임 마담들은 ‘상추댁’도 되고. 나 같은 남정네들은? 그냥 상남자…….


점심식사를 위해 유명 삼계탕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음식이 나오기 전 식탁 위에 인삼주가 준비돼 있었다. 마시기 전에 미리 사진 찍어두었다. 진한 맛이어서 마음에 쏙 들었는데, 내 옆 상추댁은 단숨에 들이켜 다들 놀라게 했다. 삼계탕 역시 진하고 깊은 맛이어서 다들 감탄하며 먹었다. 내 도가니에 큼직한 인삼 한 뿌리가 들어 있어 깜짝 놀랐다. 이걸 씹어 먹으면서 인삼이 없으면 삼계탕이 ‘계탕’이 되겠다고 농을 놓았는데, ‘계탕’이 ‘개탕’으로 변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 상추댁들과 안쓰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죽음을 짐작하고 아침밥을 거부한 어느 시골집 개 이야기 같은.


상추댁들은 사진을 많이 찍었다. 서로 사진가가 되고 피사체가 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나도 힘을 보탰다. 어느 상추댁은 앉은뱅이 국화밭을 앞에 두고 뒤에 사람 한 명씩 앉도록 한 다음, 본인은 낮게 엎드려 연달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덕분에 새로운 시선을 배울 수 있었다. 4개월에서 6개월 만에 만났으니 할 말도 많았을 것이다. 모임 진행도 상추댁들이 다했다. 암을 이겨내고 누구보다 밝게 살고 있는 상추댁, 몇 년 만에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상추댁, 땅에 떨어진 모과를 엄지와 약지로 집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상추댁, 벗들을 보고 싶어 그 멀리 창원과 청주에서 달려온 상추댁…….


입동이 지난 지 한참이고 오늘은 비까지 내리니 우리는 노란 단풍잎을 밟으며 ‘마지막 가을’을 누린 셈이다. 내가 그랬다. 다들 가을 끝 무렵 하루의 추억을 되새기며, 마스크 쓰고 수시로 손 씻고 거리 두느라 각박해진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지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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