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와인

by 박태신

잔뜩 머금은 물기를 내려 보낸 거대한 구름 뒤로 저녁노을이 너른 광채를 냈다. 노을의 앞 배경이 산등성이일 때에는 흡사 대형 산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흰구름과 연기 같은 안개, 붉은 노을이 중부고속도로 위를 간신히 제한속도를 어기지 않으며 내달리는 셔틀버스 속 나의 시선을 자꾸 잡아당겼다. 그리고 보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무지개를. 일곱 색깔 무지개는 활 모양을 한 채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본 실물 무지개인지……


11년 전 소록도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는 쌍무지개를 보았다. 단체 여행하는 버스 안이라 그 무지개를 보고 흥이 잔뜩 났더랬다. 그러나 이날은 일하러 가는 길에서 만난 무지개다. 3월 책 번역을 끝낸 후 단기직으로 물류센터에서 야간 일을 하고 있다. 피곤에 절어 잠이 든 동료 사원을 깨어 무지개를 보게 했다. 회사에 가서도 여러 사원들에게 내가 찍은 무지개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늘을 많이 올려다보시더니……” 하며 놀라는 사원도 있었고. “오늘은 성공한 날입니다.” 하는 사원도 있었다. 근무 도중 내게 말로만 전해 들은 어느 사원은 로또를 사라고 했다.


오후 다섯 시 너머 셔틀버스를 타고 경기 이남 소도시에 있는 물류센터로 출근해 새벽 네 시 너머 역시 셔틀버스로 퇴근하는 나는 창밖의 풍경을 즐겨 바라본다. 말이 셔틀버스지 여행지로 떠나는 고속버스와 다를 바 없다. 올봄부터 지금까지 각 계절의 기운이 나무와 숲을 변모시키는 모습을 내다보았다. 계절에 따라 최고 고도가 달라지는 태양이 지고 뜨는 모습을, 대기 중 수분 상태를 모양이라는 언어로 나타내고 있는 구름들을, 태양이 하루 두 번 지평선과 만나 열정을 불태우는 장면인 노을을 보았다.


8월에 새로 옮긴, 규모가 아주 작은 물류센터에는 남쪽 하늘이 넓게 보이는 마당이 있어, 식사시간인 밤 10시 무렵에 그리고 퇴근 시간인 새벽 4시 무렵에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요즘 새벽 4시 남쪽 하늘엔 겨울철 별자리가 펼쳐진다. 대표적인 것이 오리온자리. 9월 초, 지난겨울 수없이 보고 보았던 오리온자리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루가 지났다고 그 새 겉이 약간 깎인 추석 대보름도, 그믐을 향해 속이 깊게 파여 가는 하현달도, 반지름이 엄청 긴 달무리도 보았다. 주변에 야산이 있고 낮은 언덕을 깎아 건물을 지은 곳이라 짙은 안개가 자주 낀다. 구름이 지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안개인데, 얼마나 짙은지 갓 지은 밥이 든 밥솥을 열 때, 또는 불이 났을 때처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안개 연기가 작업장 안으로 밀려들기도 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셔틀버스는 용인을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탄다. 서울에 도착하면 버스는 한남대교를 건넌다.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다리 위 가로등이 켜져 있는 한강 주위의 모습을 보면 서울이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을 절로 갖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와인을 사기 위해서다. 새벽 5시에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일출이 곧 시작되는 시간대다. 보통 오후 6시 일몰 무렵 한 잔 하러 가는 모습은 코로나 이전 흔한 풍경이었다. 지금도 조심조심 그렇게들 하고 있겠고.


코로나 때문에 또는 비용 절감을 위해 집에서 혼술하는 나는 요즘 와인을 즐긴다. 저가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사고 집에 온 뒤, 새벽녘에 날이 밝아오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는 시간은 내겐 고단한 육체노동을 끝낸 후 긴 휴식을 누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가능하면 천천히 음미하며 마신다. 일몰 무렵과 일출 무렵 하늘을 수놓는 저녁노을과 아침노을 색의 레드와인을 즐긴다.

모래시계를 닮은 오리온자리의 왼쪽 윗부분 밝은 별의 이름은 베텔게우스이다. 오리온자리에서 제일 밝고 다른 별과 달리 적황색이다. 육안으로 봐도 유독 붉게 빛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별을 ‘와인 별’이라고 칭해 보고 싶다. 그 아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 별을 ‘태양 별’, 그리고 그 왼쪽으로 이 두 별과 ‘겨울의 대삼각형’을 이루는 프로키온 별을 ‘달 별‘이라고 별칭을 달아본다. 출근 무렵 낮게 눈부신 직선의 빛을 쏘아대는 태양, 보름에서 그믐까지 월령(달나이)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달, 그리고 새벽 4시 퇴근 무렵에 만나는 베텔게우스 별. 이 셋이 일 년 내내 빛을 발해 만들어 준 새벽 와인을 나는 즐긴다.

하늘 위 천체들의 운행 하에 우리는 산다. 어제처럼 비구름이 몰려와 태양, 달, 별을 다 가려 버리는 날엔 비 덕분에 산다. 모두 하늘의 선물이다. 뉴스를 보니 올 9월이 2014년 미세먼지 공식 관측 이래 가장 맑았다고 한다. 내가 위에서 소개한 것들도 거의 9월의 하늘에서다. 그 맑음 덕분에 하늘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 글을 쓰는 데 더욱 도움이 된 것 같다. 맑음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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