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등

by 박태신

내가 사는 동네에 ‘서울생활사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예전 북부법조단지를 리모델링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고 2019년에 문을 열었다. 나는 주로 낮에 이곳 마당을 산책하곤 한다. 오늘이 보름인데, 보름달이 살을 완전히 채우기 이틀 전에도 밤에 마트에 들렀다가 이곳을 거쳐 갔다. 박물관 마당 보도에는 ‘무릎등’이 많다. 내 무릎 높이로 서 있는 등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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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나무 높이의 가로등과, 밟고 지나가도 되는 바닥등과 달리 한밤중의 무릎등은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 무엇보다 사람의 발길을 밝혀주면서도 어둠도 공존하게 해주는 점이 그렇다. 꺼져 있으면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어둠을 무릎등이 불을 밝힌 후 무릎 높이까지 들어 올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을 둥글게 만들어준다. 사람보다 키가 큰 가로등은 위에서 넓게 빛을 뿌리며 어둠에게 엄포를 놓고 몰아내지만, 무릎등은 마치 동면을 하는 동물들의 굴 크기만큼만 빛 자리를 차지하고서 고요하게 머물러 있다.


그런 무릎등은 지나가는 이들이 시시때때로 쳐다봐도 좋을 만큼의 밝기만 지니고 있다. 눈부시지 않다. 그래서 무릎등이 간격을 두고 자리 잡은 길가는 오래전 드문드문 떨어져, 한지창으로 불빛을 내보내고 굴뚝으로 하얀 연기를 내뿜던 시골 동네 집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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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은 빛을 따라 저절로 아래로 향하고 내 발은 튀어나온 돌에 걸리는 일 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여러 개의 무릎등이 있는 길을 걸을 땐 무게중심을 하체에 둔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 어둠이 조금 짙은 정면을 보며 걷는데, 자꾸만 따사롭고 낮은 무릎등에 시선이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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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무릎등은 각별하다. 2019년 부여 궁남지에서 연꽃 축제 때 본 것이 특히 그러했다. 궁남지 내 커다란 연못 한가운데 섬으로 이어진 나무다리에 무릎 높이만큼 다리 밑으로 줄지어 걸려 있던 연등은 다리를 건너는 이들의 발길을 돕지만, 한편으로 밤마다 물 표면에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놓고 나르키소스처럼 위태로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다리의 쌍둥이 연등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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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보강천 천변공원의 무릎등은 태양광으로 불을 밝힌다. 역시 작년 이 공원 자작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해 태양에서 힘을 얻은 무릎등 사이를 걸었고, 하천 너머 보름달도 청주공항으로 하강하는 여객기도 마음껏 보았다. 참! 달도 태양의 힘을 얻어 빛을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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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남양주 다산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초입 어느 마당 깊은 식당에서는 색다른 무릎등을 보았다. 수국과 능소화 사이에 둥실둥실 떠 있는 보름달 무릎등이다. 태양을 도는 행성들 같다. 사람들로 들썩거리지 못하는 요즘 시절에도 보름달 무릎등은 이른 시각부터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산책로 나무들의 신진대사엔 물론 밤의 어둠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성탄절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동네 산책로 한 곳 몇몇 나무에 트리 전구를 칡덩굴처럼 달아놓았는데 처음 보았을 땐 그 모습이 신기했고 울적한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새 나무들은 충분한 휴식을 방해받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다닐 수밖에 없는 산책로 나무에겐 키 높은 가로등보다 무릎등이 더 낫다. 더욱이 윗부분을 덮개로 가리고 옆으로만 빛을 내는 무릎등은 산보객들이 하늘의 별을 보면서 걷을 때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 계속 날씨가 흐려 별과 행성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 보름날의 보름달도 희뿌연 구름 속에서 진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다. 저 달을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볼품없는 무릎등이 될 것이다. 나는 앉은뱅이책상에서 작업을 한다. 문뜩 생각이 나 천장 등을 꺼보았다. 책상 옆 스탠드가 영락없는 무릎등이 되었다. 하늘은 흐리고 바닥은 밝다. 추운 겨울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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