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치 있는 풍경의 효능

by 박태신

다음날에야 장염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이 안 좋아도 그날은 에스프레소를 꼭 마시고 싶었다. 수원에 가려고 마음먹을 때부터 결심한 바다. 한 가지 과제를 끝내고 다음 일을 하기 전, 전 같으면 여행을 떠났겠지만 바람 쐬는 것으로 대신해 간 곳이 수원이다. 생각해 보니 지하철을 타고 간 곳이고 대도시인지라 여행지라고 말하기에 약간의 궁색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도심에서 멋진 풍광을 보았고 1박도 한 것이어서 여행한 것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사실 예방 차원에서 몇 달 동안 카페 출입을 삼갔고, 한두 번의 주점 방문 이외에 끼니도 패스트푸드점에서 몇 번 해결했을 뿐이다. 여행 가면서 진짜 밥을 먹는 식당에 출입하고 내가 좋아하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도 들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힘겨운 과제를 끝낸 보람은 컸지만, 다른 힘겨운 일을 앞두고 있는 데다 이런저런 부질없는 시름이 보태져서 우울하게 수원 화성 내 행궁동을 거닐었다. 그러다 우연히 멋진 카페를 발견했다. 3층짜리 거대한 카페인데 ‘행궁81.2’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주문을 한 뒤 2층 창가 자리에 있는 3인석 탁자를 발견하고서, 창가가 눈앞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컬링 동계올림픽 종목의 스톤처럼 생긴 알람기가 주문한 커피가 준비되었다고 무지막지하게 진동을 해댔다. 1층으로 내려가 카운터에서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철판 쟁반을 건네받았는데, 그 위 강렬한 붉은색의 커피잔 세트와 검은색 에스프레소 커피의 황토색 표층이 시선을 잡아당겼다. 쓰디쓴 에스프레소에 걸맞은 색감이었다.

집에선 스틱커피로만 맛볼 수 있었던 진한 맛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늘 그렇듯 아껴가며 마셨다. 창밖으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참새들이 쉴 새 없이 가지와 가지를 오고 가고 있었다. 겁이 적은 사람과 겁이 많은 참새 사이에 투명하지만 창유리라는 안전 막이 쳐져 있어서 참새들은 내가 쳐다보든 말든 마음 놓고 운신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귀엽고 생동감 넘치던지. 참새들의 몸짓은 유연하지만 물처럼, 직선처럼 쭉 이어지는 몸짓은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땅바닥에서 총총걸음을 하고 주둥이로 먹이를 쪼아대는 몸짓은 한 음씩 또렷하게 들리는 플루트 연주 소리 같다. 바닷물이 물결치는 것 같은 피아노 소리, 음과 음이 실처럼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다. 또 이가 맞물려 척척 돌아가는 기어 바퀴 움직임 같다.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처럼 작은 새들을 볼 때 늘 신기해하던 모습이다.


운치 있는 카페에서 운치 있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창밖으로 참새와 낮은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시름이 거동을 멈추고 있었다. 내게 시름은 지나친 자책감과 책임의식,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일부러 몸에 피로를 쌓는 버릇에서 비롯할 때가 많다. 수익률 낮은 시름이다. 욕실 바닥 배수구에 잔뜩 끼인 머리카락 뭉치를 제거하지 않아 샤워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듯 시름을 껴안고 있는 형국이다. 나 같은 사람에겐 누군가의 잔소리나 언뜻 떠오르는 기분 나쁜 생각의 잡음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보내는 우둔한 감각이 보약이다.


그러기가 쉽지 않을 때 이날 경험했듯 운치 있는 풍경이 도움이 된다. 비유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포스트잇에 묻어 있어 접착력을 떨어뜨리는 먼지처럼, 운치 있는 풍경은 내 집착의 접착력을 떨어뜨려 준다. 수원의 행궁동 거리에서 그런 풍경들을 많이 보았다. 글을 쓰는 나에게 힘이 되는 문구, '00 도사' 점집의 동화 속 풍경이 그려진 우편함과 자전거, 복고풍 물건을 파는 가게 안 잠자는 고양이 인형, 잘 보이지 않지만 꽃들 속에서 벌들이 작업하고 있는 행궁(지방 궁궐) 내 고풍스러운 매화나무 등등. 소박한 여행을 살뜰하게 하고 왔다. 마음이 힘들 땐 운치 있는 풍경에 시선을 꽂아 마음속 시름이 가라앉거나 떠나가게, 별 거 아니게 만들 일이다. 효능 좋은 마음 치유법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