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식물학자

by 박태신

3월 말 스산한 추위 속에 새벽길을 걷고 있는데, 거리 홍보 게시판에서 섬세한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물 세밀화다. 그 그림은 전시회 소개 포스터 한가운데를 자리 잡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림이 섬세했을뿐더러 ‘식물학자의 초대’라는 문구 덕분에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프랑스 현대 식물학자의 저서 번역을 끝낸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식물 세밀화가의 작품 전시회인가 보다 여기고 지나갔다.


나는 인적이 뜸한 곳을 느린 걸음으로 여행할 때, 집 근처 경춘선 철길 산책로를 걸을 때 이름을 알든 모르든 길가의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곤 한다. 눈이 나빠 안경 벗고 암술과 수술을 찾아보고 꽃잎 수를 세어보고 꽃들 속에서 수직 이착륙하는 벌과 나비의 움직임도 살핀다. 얼마 전엔 마스크 쓴 채로 조팝나무 꽃의 향기를 맡으러 숨을 크게 들이쉰 적도 있다. 지난해의 산실인 열매가 쭈그러진 채 달려 있는 와중에 올봄의 꽃을 피우고 있는 산수유를 볼 때마다 그 공존에 대해 궁금증을 갖곤 한다.


그렇지만 정작 내 집엔 화초가 없다. 키울 자신도 없고, 식물도 한 생명인데 그 생명을 방안에 들여놓는다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기 말고 내게 다가온 곤충을 내쫓거나 죽이질 못하고 오히려 유심히 살피곤 하는데, 이와 유사하게 산속과 길가 꽃의 꽃잎을 따거나 가지를 꺾는 일은 내겐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소심하다. 식물학자가 되긴 영 글러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즘 삭막해진 내 마음의 탄력을 되찾기 위해 작은 화분을 들여놓을 생각을 하게 됐다. 화분 놓을 자리도 마련했다. 그리고 세밀화 전시회를 통해 기운을 얻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이 고양된 4월 초 관람을 결심한 날, 가기 전 전시회가 열리는 ‘노원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처음 가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시회 소개 코너를 클릭했다. 그러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밀화를 그린 화가가 바로 식물학자였 것이다. 전시회의 주역 신혜우 작가의 정식 직업명은 식물학자이자 과학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다. 식물 분류학을 전공한 식물학자가 세밀화 화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17세기 프랑스의 식물 분류학자 중 투른포르(Tournefort)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식물학의 기본원리』라는 책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 성공엔 클로드 오브리에라는 식물 화가의 식물 그림 삽화가 큰 몫을 차지했다. 오브리에의 판화가 투른포르의 섬세하지만 무미건조하기도 한 식물표본을 훨씬 더 표현력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관람 즈음에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의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읽고 있었는데, 그를 두고 한 문학평론가는 “(나는)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그의 좌뇌를 질투하지 않고,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이 말이 신혜우 작가의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떠올랐다. 작가는 학문과 예술을 겸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시회장의 첫 벽면에 소개된 그림은 형형색색의 꽃이 아니라, 광합성을 하지 않아 몸에 초록색이 없고 일반적인 뿌리조차 없기도 한 전(全)기생식물들이었다. ‘흡기’라는 변형 뿌리로 숙주에게서 영양분을 빼앗아 먹으면서, 노르스름하고 가늘게 어느 초록 식물의 줄기에 얽혀 살고 있는 미국실새삼이라는 식물이 그렇다. 그림들 옆에 마치 책의 한두 페이지가 붙어 있는 것 같은 그림 소개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작가답게 설명이 상세했고, 내겐 글씨도 작아 보였다. 아무튼 겨우살이처럼 ‘겨우’ 사는 식물에게도 작가는 남다른 애정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술패랭이, 해국, 방가지똥의 세밀화를 보았다. 그 그림들은 온전한 식물 외형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림 속엔 과학이 들어 있었다. 뿌리, 잎, 줄기 등 원형 모습이 한가운데 있고 그 가장자리에 꽃의 윗면과 측면이 같이 그려져 있으며, 잔뿌리와 수술을 비롯해 꽃가루와 물관인 듯해 보이는 부분들이 mm 단위로 그려져 있었다. 현미경을 보면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자생지 현장과 지도 그림도 덧붙여 있었다. 수채화로 그려진 이 그림의 붓은 과연 어떤 종류의 세필 붓일까.


또한 작가의 그림엔 시간이 농축돼 있었다. 원형으로 그려진 산수국 그림에는 꽃눈과 꽃봉오리 상태를 비롯해 개화, 만개, 시듦 등 꽃의 일생을 나타낸 작은 그림들이 세세하게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문헌 조사, 채집 등의 사전작업을 포함해 그림 한 편에 1년, 길게는 3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림 하나가 논문 한 편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로 작가는 세계적인 명성의 상들을 여럿 수상했다.


내가 거리 게시판에서 본 꽃은 변산바람꽃이었다. 이 글 맨 처음 사진이 그것이다. 학명이 Eranthis byunsanensis(원래 이탤릭체)이다. 뒤의 종명에서 추정할 수 있듯 전라북도 변산에서 발견된 한국 특산의 봄꽃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듯 꽃자루가, 검색해서 본 실물 사진 속에서보다 더 길쭉해 보인다.


내게 낯익은 풍경도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작가가 채집, 제작한 산수유의 표본이다. 식물표본은 번역하면서 구글 자료를 통해 많이 보았다. 표본 대지에 건조와 압착을 거친 산수유의 줄기, 가지, 그리고 내가 ‘노랑 함박눈’이라 별칭을 붙인 산수유 꽃이 생생한 상태로 고정돼 있었다. 오른쪽 아래엔 표본의 모든 정보가 기록된 라벨이 붙어 있다. 표본 왼쪽 위 종이봉투 속엔 혹시 종자가 들어 있지 않을까?


이외에도 너무도 미세한 일종의 세포이자 번식원인 포자까지 그려 넣은 고사리류 그림, 겉씨식물의 종자와 열매(솔방울) 그림, 이곳에선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나비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투명 유리에 부착돼 앞면과 뒷면을 같이 볼 수 있는 봄나물들, 책상 위 물병에 담긴 봄꽃들, 받침대 위 비커에 가지째 꽂힌 봄꽃들, 시험관에 넣어져 공중 부양하고 있는 봄꽃들의 실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곳 전시회장의 그림들은 여러 식물의 개성 넘치는 일종의 자기소개서다. 작가가 대신 작성해 대중이라는 심사위원들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에겐 합격, 불합격은 관심 없을 것이다. 식물끼리 경쟁이 있다 하더라도 작가에겐 자신이 소개하고 싶은 식물에 대한 애정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이웃집 식물학자의 초대, 봄꽃봄’이다. 우선 재기 넘치는 단어 ‘봄꽃봄’을 보자. 봄꽃의 ‘봄’은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과 같아서 다른 계절 꽃들의 시샘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람(風)’과 ‘바람(希)’도 서로 친근하다. “이 더운 날, 바람이 불기를 바람”, “내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람에게 빌어봄” 등등.

‘이웃집 식물학자’라는 표현은 작가가 이번 전시회에서는 학구적인 것보다는 따뜻하고 친절한 전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다. 자칭 ‘동네 식물학자’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이 식물들과 친근해지도록 돕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는 노원구에 그런 식물학자가 산다.


전시회장에서 그림과 실물의 봄꽃들을 보았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의 얄팍한 지식에 두 손 가득 양분이 보태졌다. 그건 그렇고 기운은 한껏 받았는데 화분을 방에 들여놓을까 말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조금 더, 산책하고 바람을 맞으면서 마음속에 바람을 집어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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