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러운 풍경

by 박태신

단풍나무가 정말 많았다. 단풍나무길이라고 해도 되겠다. 수덕사 올라가는 길은. 녹색의 단풍나무 잎과 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무수한 잎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눈이 즐거웠다.


언젠가 잎 하나 위에 두 잎 그림자가 아늘거리는 모습, 잎 그림자 위에 또 다른 그림자가 율동적으로 겹치는 모습을 세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투명해서 보이는 그림자. 그렇게 잎들은 간격을 두고 포개져 그림자를 만들더라도 서로 달라붙지는 않는다. 잎의 주체성이다.


그런 단풍나무 밑에 “꽃씨를 뿌렸습니다^^”라고 쓰인 간이 안내판이 외줄 울타리에 매달려 있었다. 문구 속 이모티콘처럼 미소가 절로 나왔다. “들어가지 마시오”의 험악함이 싹 사라진 예쁜 표현.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 경쟁이 벌어지는 ‘바람과 해님’ 우화가 생각났다.


일주문 옆에 세워진 ‘선(禪)미술관’에 가려면 ‘해탈교’를 건너야 한다. 누각 황하정루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 턱에는 ‘대해탈장’이라는 글자가 한자로 원고지 칸처럼 새겨져 있다. ‘해탈’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기운 덕분인지 수덕사에서의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얽매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천왕문’에 들어갔다. 무섭게 생긴 사천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각 존재들의 역할을 알리는 안내판을 살펴보았다. 악한 것을 물리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니 중생들의 보디가드라고 하겠다. 가톨릭의 수호천사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과 동격의 존재라고 하겠다.


범종각은 많이 봤어도 법고각은 처음 본다. 수덕사에는 둘 다 있다. 범종각에는 대형 범종만 있고 법고각에는 소리로 부처의 진리를 전하는 사물인 법고, 목어, 운판, 범종 모두 다 있다. 대신 법고각의 법고는 엄청 크고 범종은 모서리에 작게 달려 있다. 수덕사 법고각의 범종은 영화에서 조연보다도 더 비중이 적게 등장하고 영화 끝에 ‘그리고 아무개’로 소개되는 중견배우 같다.



불교 역사를 보면 관음보살은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등장하는데 수덕사의 관음보살은 여성이다. 수덕사 창건 설화에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수덕 각시, 덕숭 낭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울 길상사의 관음보살상(바로 위 사진)은 성모상을 닮은 보살이다. 가톨릭 신자 최종태 조각가가 법정 스님의 부탁을 받은 후 종교 간 화해를 소망하며 만든 보살상이다. 법정 스님이 그랬단다. 관음보살과 성모 둘 다 어머니라고.



수덕사 대웅전은 여러 층의 돌 기단 위에 배흘림기둥으로 세워졌다. 배흘림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부풀어 있어 안정감이 든다. 오랜 세월의 평온함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그런데 대웅전 기단 앞 왼쪽 끝에 특이하게도 분홍낮달맞이꽃과 양귀비꽃이 심어져 있었다. 낮달맞이꽃은 사진에서처럼 달밤이 아니라 낮에 핀다. 그리고 사찰 안에 양귀비꽃이라! 수덕사 경내 곳곳에는 분재들이 아기자기 놓여 있었다. 수덕사는 화초도 아름다운 절이다.


별스러움이 많은 수덕사를 둘러보았다. 내려와 정류장에서 면내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리고 또 다른 풍경. 버스 출발 오후 7시 되기 전, 수덕사 아래 식당촌 주방에서 일하고 퇴근하는 아낙네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서로들 인사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의 면내 버스는 이곳 일꾼들의 셔틀버스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도 여행객은 나 한 명. 다들 자가용 몰고 다니는데, 여행지에서 퇴근하는 이곳 분들에게 나야말로 별스러운 존재였겠다. 어쩌다 끝까지 별스럽게 행동하게 되었다. 하룻밤 머물 거처로 짊어지고 가는 내 배낭에는 혼자 여행으로는 처음, 이곳 마트에서 산 와인 한 병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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