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요일의 일탈

by 박태신

경조사 때나 입는 양복을 옷장에서 꺼냈다. 구두도 꺼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그건 오늘 같은 날엔 적합하지 않으니까. 매일같이 밤샘 작업을 하며 작업복 차림으로 지내기 일쑤였는데 어제는 오늘을 위해 쉬고, 이른 아침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일탈의 시작이다.


시내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곳 광화문 나들이는 요즘 드문 일이 되었다. 쉬는 날엔 잠을 피로회복제 삼아버리곤 하는데 사실 나갈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은 두 가지 명분이 있었고 이날의 일탈을 뽐내기 위해 양복 차림을 한 것이다. 오전엔 회사에서 규정한 특수건강검진, 저녁엔 내가 속한 동아리의 정기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정 사이의 긴 간극을 채우는 광화문 나들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화문에 있는 모 검진기관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풍경을 보았다. 층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층마다 30~40명 모두 검진용 가운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풍경이었다. 다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다가 20여 개 되는 검사실을 차례차례 드나들었다. 모든 방마다 사원증 같은 카드를 찍고 들어가야 했다. 작년에 보지 못한 신설 시스템이다. 각 방의 간호사나 의사는 하루에도 똑같은 안내 말을 수백 번 할 것이다. 몰개성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귀빈이 된 것 같기도 하고 SF 영화 속 복제인간이 된 것 같은 그날의 경험은 일탈과 다름없었다.


아침을 거르고 가야 했기에 검사가 끝난 나는 허기에 지쳐 걷다가 순댓국집에 들어갔다. 내가 첫 손님이다. 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순댓국을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일상적인 식당 음식이지만 외식을 잘하지 않는 나로서는 일탈의 날다운 별미 음식이었다.


수확을 앞둔 과일처럼 탐스러운 햇볕을 쬐며 거리를 걸었다. 내가 원하던 본격적 광화문 나들이의 시작. 종교교회를 돌아 광화문 역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낯익은 조형물을 발견했다. ‘WOOD(밤나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오래전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기 위해 기차역에 세운 급수탑처럼 생겼다. 이재효라는 조각가의 해설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나는 볼품없는 것들, 쓸모없어진 것들, 아름답지 않은 것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들로 작업을 한다.”


나는 지난달 경상북도 청송의 ‘객주문학관’ 마당에서 같은 조각가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원형 모양을 하고 있고 제목은 역시 ‘WOOD’인데 청송의 특산물인 사과나무 줄기와 가지로만 만들었다. 조각가는 관람객이 의미를 묻지 말고 그저 친구처럼 자기 작품을 대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 당부가 신선했다. 그땐 몰랐는데 이곳 광화문 작품을 보고서, 조각가가 생나무가 아니라 이젠 쓸모없어진 죽은 나무 구성물들을 재료로 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음을 깨달았다.



작품 뒤쪽 그러니까 세종문화회관 뒤쪽 미니 공원에는 거대한 칠엽수 몇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 아래 정사각형 모양으로 벤치들이 둘러싸 놓여 있다. 산보하다가 앉아 휴식하고 책 읽기엔 최상의 장소다. 잎이 일곱 개라 ‘칠엽수’라 불리나 싶어 일일이 세보니 그렇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가운데 잎이 가장 크고 양옆으로 갈수록 작아진다고 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역시 그렇다. 초가을, 잎 가장자리가 물들기 시작하고 있다. 칠엽수의 또 다른 이름은 ‘마로니에’. 점심시간대라 멋진 가을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거리와 정원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 아래 앉아 이날 틈틈이 그랬듯 책 한두 쪽을 읽었다. 자리를 옮겨 내가 애음하는 에스프레소 한 잔도 하면서.


새단장한 광화문 광장이 궁금했다. 광장 전체가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밀착 확대된 상태라 접근이 수월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은 얼마 전 목욕재계(세척)를 마친 상태다. 영화 <한산>을 보았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앉은뱅이 돌 표지판 중 ‘한산도 해전’을 더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동상 앞쪽에서 할아버지 두 분이 육식을 개탄하고 각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계셨다. 점심에 순댓국을 먹었고 저녁 모임 자리는 족발집이라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쭈뼛거려 눈여겨보지는 못하고 두 분 앞을 슬며시 지나갔다.


광장엔 생동감이 넘쳤다. 그날 하루는 가을하늘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운 좋은 날이었다. 뭉게뭉게 들떠 있는 흰구름들이 마음껏 창공을 누비는 모습이, 쾌적함을 누리며 삼삼오오 산보객들이 광장을 걷는 모습과 닮았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어딘가로 핸드폰을 들이대고서 5분도 넘게 미동도 하지 않은 외국인도 보았다. 보기 드문 신선한 모습이었다.


커튼을 열어젖힌 창 모양으로 대형 외부 패널화로 공사 현장을 가린 모 통신회사 건물도 산뜻해 보였다. 저 멀리 ‘광화문’과 북악산 그리고 주인 없는 청와대 지붕이 보였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이 광장에서 눈길이 저절로 이끌어지듯 인기를 독차지한 곳은 ‘터널분수'였다. 이곳의 주인공들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분수 속을 마음껏 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속으로도 겁 없이 달려들었다. 아마도 아이들의 온몸이 젖는 순간은 아이들의 마음이 거칠 것 없이 하늘을 활공하는 새들 마냥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도 한번 들어가려고 시도해보았으나 물에 젖는 것이 겁이 나 포기하고 말았다. 실제 나이뿐 아니라 마음의 나이도 어려야 이곳을 지나갈 수 있으리라.

그런데 뜻밖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며 터널분수를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어느 꼬마아이가 물을 맞으며 지켜보고 있고. 이 순간 이들은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나처럼 이날 입은 양복 차림에 걸맞게 행동거지를 조신하는 대부분의 성인들은 언제 이런 자유를 누려볼까.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런 풍경을 본 것으로도 행운은 누린 셈.


광화문 나들이를 하며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는 이번 가을의 ‘광화문 글판’은 무슨 내용일까였다. 교보빌딩 4, 5층 높이에 걸려 있는 그 글판을 눈여겨보았다. 이번 시 구절도 메마른 가슴에 물기를 대주는 호수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강은교 시인의 ‘빗방울 하나가 5’)


달리는 고속버스의 창에 달라붙은 빗방울들은 지렁이마냥 대각선으로 기어가며 내 눈길을 끌어당기곤 했다. 그것을 시인은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고 싶’어 한다고 표현했다. 내 몸에서 증발한 땀과 내 주변을 거쳐 간 물은 세상을 돌고 돌아 결국 빗방울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러니 두드린다고 할 수밖에.

나는 밤마다 별이나 행성을 두드린다. 하늘이 갠 날엔 목성뿐 아니라 오리온 별자리 위를 활공하는 불그스름한 화성도 볼 수 있다. 오리온자리 윗부분 맨 왼쪽의 별, 역시 그 불그스름한 색 덕분에 내가 ‘와인별’이라 부르는 베텔게우스는 내 눈에 유독 잘 보이는 별이다.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찾아본다고 해야 맞겠다. 두드리는 것이다.


부러 이 시의 원문이 든 시집과 해설 글을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상상한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두드림’이 들뜬 마음상태이고 능동의 행위라고 여기기도 했다. 시는 시어(詩語) 하나로도 한 줄의 문장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키지 않는가.


‘일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한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잘못된 행위를 일탈(逸脫)이라고 한다. 달아나고 벗어나는 행위이다. 사전을 찾아보고 이런 부정적 의미로만 가득한 단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日脫)을 말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사전에 없는 한자어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보통의 우리네 일탈은 별스러운 행동 정도가 대부분일 것이다. 가끔 비싼 물건을 ‘질러’ 사보기,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기, 계획표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순서대로 행하기 등등. 또한 오늘 본 것처럼 터널분수를 지나간 노부부의 행동은 짜릿한 일탈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염두에 두고 있고 잘 진행되리라 믿고 있는 일상의 일들에 그날그날 어떤 변수나 변화가 있을지 모르며 사는 존재다. 그래서 일상을 사는 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탈(日脫)은 건강한 일상을 도모하는 행위이다. 일상에서는 위쪽 호흡(얄팍한 가슴호흡)을 하며 살 때가 많지만, 일탈은 아래쪽 호흡(복식호흡)을 되찾아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이다.


나는 예정된 일탈을 이날 하루 보냈다. 양복차림, 손에는 애서(愛書) 한 권, 수첩과 펜, 벤치 휴식, 광화문 광장 나들이, 교보문고 유람, 그리고 기대되는 회식 등등.


정비를 안 해 예스러움이 남아 있는 모 시장 한가운데, 우리 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주인장 족발집에서 푸짐한 서비스를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회원 간의 대화는 더없는 술안주. 그렇게 수요일의 일탈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과음한 나머지 나는 노선이 낯선 6호선 역사 안에서 집 방향과 반대 노선을 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말았다. 졸다가 깨어나 집 방향으로 갈아타 무사히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이런 일탈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