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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Feb 28. 2023

“사치할 걸”

◆ 투샷 에스프레소     

동네에 상호명이 ‘표준커피’인 카페가 있다. 교과서적인 이름이나 책이 가득한 카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명 브랜드 카페 매장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탁자와 의자, 혼자 일하는 중년 주인장의 여유로운 모습이 고답적이다. 경춘선 숲길 공원 내 옛 철길 따라 걷다가 아이쇼핑만 했는데 어느 날 용감하게 들어가 보았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니 주인장이 “원샷, 투샷 중 뭘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에스프레소 애호가이자 진한 커피를 좋아하니 저절로 “투샷이요”라는 말이 나왔다. 그 진한 맛이란......! 이후 세 번째 들렀을 때 주인장은 “투샷이시죠?”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직접 커피를 내가 앉은 테이블에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여러 카페를 들르며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지만 ‘샷’을 묻는 곳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물어봐줘서 좋았고 그 진한 맛 덕분에 단골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게 표준이구나’ 싶다.      


◆ 정사각형 흰색 메모지

몇 달 전 노원역 근처 문구점을 겸하는 중형 서점에서, 사려던 책과 함께 독특한 메모지를 발견해 충동 구매했다. 포스트잇처럼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낱장 하나씩 들어내 쓰는 메모지인데, 정사각형이고 보통의 포스트잇보다 크기가 커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보통 집에서는 줄 없고(‘무선 노트’) 스프링 달린 갱지 연습장에다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한다. 맨 앞 페이지에 메모 시작 날짜를 기입하고서 단상이 떠오르고 쓰고 싶은 의욕이 생길 때마다 메모를 한다. 길게 쓸 때도 있지만 보통 그날에 특이했던 경험들을 한두 줄로 적곤 한다. 줄이 없는 맨 연습장이라, 오른쪽으로 30도 정도 기운 내 글씨체는 국경을 모르는 철새처럼 자유로운 횡보의 자국으로 남는다.      


그동안 이 연습장에서 많은 브런치 글들이 탄생했다. 노트북으로 정돈된 글을 쓸 때까지 이 연습장들은 잘린 자국이 있고 가는 줄기와 이파리 몇 개가 달린 생나무였다. 멋지게 필기체로 글을 써나간 근·현대 시대 문인들의 초고 원고를 보면 내 연습장이 볼품없기 짝이 없다. 이른바 반듯하게 쓴 ‘표준 노트’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연습장엔 줄 간격이라는 제재가 없고 기록할 단어 선정에 그다지 고심을 하지 않기에 쓰면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그런데 소형 낱장 메모지를 쓰다 보니 다른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득 튀어나온 생각을 간단히 적고 번호를 매긴 다음 엎어놓다 보면, 많은 내용이 담긴 연습장을 훑어볼 때의 수고로움 없이 순간적으로 되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귀차니즘’이 만연해진 요즘 낱장 메모지는 어제 그제 생각한 것들을 책상에 앉아 즉석에서 상기시킬 수 있어 요긴한 애용물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내 연습장은 거미줄이 촘촘하게 쳐져 있다.      


◆ 길고 긴 검토서

보름 전쯤 내가 관여하는 에이전시 카페에 들어가 프랑스 신간 소개란을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있어 유심히 살펴보다가 고민에 빠졌다. 원서 페이지 수가 335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과감하게 원서 파일 송부 신청을 했다. 이렇게 원서 파일을 받으면 내용을 살펴보고서, 번역하고 싶은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요약 정리한 검토서를 작성해 보내야 한다.    

  

1주년을 맞이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가 실린 책이었다. 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이 많다. 오래전부터 국내 신문을 많이 보았는데 얼마 전부터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지 사이트에 들어가 기사를 읽으며 실시간 전쟁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나는 번역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삶을 선택했다. 직접 다른 세상의 현장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나 나름대로의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길 고대하면서 뉴스를 접했기에 이 책은 내게 각별했다. 보통 검토서는 A4 용지 두세 장이면 적당한데 나는 아홉 페이지나 썼다. 부분 부분만 살폈을 뿐인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 조금 무리한 것 정도가 아니라 미련퉁이 같은 작업이었다. 주요 관심 분야라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번역자가 될 가능성은 적지만, 큰 숙제를 하고 난 뒤의 후렴함이 있어 좋았다. 안 돼도 여한은 없을  것이다……아니다. 거짓말이다. 여한이 많을 것이다. 내게 너무 높은 산이지만 등반하고 싶다.      


◆ 분담금     

얼마 전 지인들끼리 회식 자리가 있었다.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다들 어떤 ‘꼴’로 사는지 안부를 묻고 친교도 나누는 자리다. 우연하게 일련 순서대로 나이가 한 살씩 차이 나는 네 명의 모임인지라 건배할 때 각자 탄생 연도 끝자리를 차례차례 외치는, 아주 별난 건배 구호의 소유자들이다.      


이들 중 맛집을 잘 아는 이가 있어 나로서는 회식 장소를 전적으로 일임하는데, 이날도 그런 곳에서 푸짐하게 음식을 먹었다. 음식 값은 시대사조에 맞게 더치페이로 하는데, 후일 일원 중 막내가 N분의 1일로 계산해 카톡방에 올리면 각자 송금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먹은 것에 비해 음식 값이 아주 적게 나와 의아해할 정도였다. 내가 “이것밖에 안 나왔나?” 문자를 보내니 막내가 “그러게요. 좀 더 사치할 걸요” 하고 답변했다. 개별 분담금이 2만 원도 안 되었으니 비싼 맛집에 간 것이 아님을 덧붙인다.         


그 후 이 ‘사치할 걸’이 내 글의 소재가 돼 머릿속을 돌고 돌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사치스럽다’라는 표현은 자주 쓰지만, 주변에서 “사치할 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만약 행여나 우리 모임이 고액을 지불하는 곳에서의 ‘좀 더 사치할 걸’이었다면 나는 이 글을 쓸 수도 없고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임금으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사치’를 통해 연관 있어 보이는 내 사례들을 적어본 것이다.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요즘 저녁 7시쯤 서쪽 하늘엔 목성과 그 밑으로 두 배 더 밝은 금성이 떠올라 있는데 그런 모습 자주 보자고 독려하고 싶은 것도 있다. 태평한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럽게도 한동안 줄였던 와인 음주가 요즘 족쇄 풀려, 10900원 하는 ‘트리벤토’ 아르헨티나 와인을 자주 사다 마시는, 내게 ‘고비용’ 사치 하나도 첨부하겠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하는 데엔 나름의 기댈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가끔씩 꺼내 읽는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라는 책에서 저자는 85세에 숨진 어느 미국인 노인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시가 그 구석이다.  


“……

내가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지난번 살았던 인생보다 좀더 우둔해지며

가능한 한 심각해지지 않고

더욱 즐거운 기회를 잡으리라.

여행도 더 자주 다니고 혼자서 석양을 더 오래도록 바라보리라.

……”     


어젯밤에도 나는 휴대폰에 깔아놓은 천체 관측 앱 ‘Stellarium’을 통해 실시간 별과 행성의 위치를 확인했고 밤하늘도 올려다보았다. 이 앱 화면엔 앙증맞게 생긴 인공위성이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망원경이 있으면 좋겠고 천문대에 가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정도로도 ‘사치스러운’ 밥상을 누릴 수 있다.


2월 마지막 날이다. 봄의 시절이 다가오는 때에 다들 “사치할 걸”에서 출발해 (조금은) “사치했다”라는 경험을 자주 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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