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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Mar 27. 2023

연하디 연한

1. 아이보리색 목련꽃들은 만개하기 30퍼센트 전쯤의 모습이었다. 이 목련꽃들은 나무를 안뜰에 두고 있는 연한 그레이 색 아파트와, 마냥 하얗지는 않은 구름과 조화를 이루었다.     


여린 바람에 목련꽃들이 흔들흔들했다. 작은 꽃이 아니기에 그 흔들림이 우아하다. 다행이다. 만개함과 동시에 진하게 곪은 색을 띤 목련 꽃잎이 속절없이 뚝뚝 떨어지기 전의 모습을 보았기에.      



2. 연분홍 꽃색의 매화나무 한 그루가 과학기술대 정문 옆에 있다. 학교 울타리 역할을 하는 거무튀튀한 나무들 사이 한 그루만 심어져 있어 그 연한 색깔에도 두드러져 보인다. 매년 본 것이라 올해도 피어 있겠지 기대했던 장면이다. 역시 그랬다.     


3. 지난 토요일 학교 앞 복사가게에 들르던 길이었다. PDF 파일로만 보기엔 답답하고 불편해서 나는 소장도 할 겸 검토할 원서를 매번 프린트하고 스프링 제본을 한다. 이전엔 투명색만을 고집했으나 요즘은 프린트물 앞뒤를 커버해 주는 플라스틱 덮개 색을 고르곤 한다. 이번엔 연두색과 연한 녹색을 선택했다.   

   

가게를 나와 근처 맥도날도 햄버거 지점에 들렀다. 빅맥 세트를 주문해 점심으로 해결하는 일은 내겐 드문 일이라 식사하는 내 모습이 영 어색했다. 내용물을 흘리고 케첩을 손에 묻히고…… 그래도 4년 만에 과학기술대 산책을 결심했기에 젊은이다운 행보를 하고 싶었다. 학교 들어갈 때 내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가 쥐어져 있었다.      



4. 벌써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느닷없이 처음 보았다. 병아리 발자국 같은 노랑 꽃잎들은 완연해지려고 하는 봄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다. 반면 살결이 얇아 속까지 비치는 분홍 진달래도 올해 처음 보았다. 두터운 콘크리트 보도 옆엔 움츠리듯이, 연못 주변 곳곳엔 화려한 춤사위로 피어 있었다. 과학기술대 안 꽃들은 군락을 이룰 정도의 규모가 아닌, 적절하거나 작은 규모로 곳곳에 심어져 있어 그 아담함이 좋다.       



5. 메마른 가지들이 얼기설기 뒤엉켜 있는 직사각형 공간 모양의 등나무 벤치에서 포도송이 같은 등나무 꽃을 보려면 아직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 싱그러움 없는 그 벤치에 잠시 앉았다. 예전 자주 들른 이곳에서 책도 읽고 메모도 했을 것이다. 잠시 휑한 느낌과 함께 했다. 꽃나무마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기에 지금의 휑함은 이 등나무에겐 적절한 외관이다. 초봄의 빈 그릇이다.       



6. 교내 연못인 ‘붕어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른바 ‘수변데크 길’이라고 하는데, 연못 속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나무 패널로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낯설었다. ‘붕어방’의 붕어들은 괜찮게 지낼까? 그렇지만 전과 달리 연못 위를 가로질러 갈 수 있어 좋았다. 외곽을 돌아야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불편함은 사라졌다.  

   

때마침 분수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물줄기 모양이 연못 한가운데 있는 ‘소나무섬’, 그곳에 딱 한 그루 심어져 있는 늠름한 소나무와 비슷했다. 연못 주변은 학생이나 동네사람 산보객들에겐 전보다 더 근사한 산책로가 되어 있었다. 산수유 꽃은 절정에 달했고 벚꽃도 피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연못 쪽으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릴 능수벚나무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걷다가 벤치에 앉아 이 풍경들을 둘러보았고, 휴대폰을 벤치에 올려놓고 셀프 모드로 벤치 위 풍경도 담았다.        



7. 몇 년 만의 교내 나들이에서 올해의 처음 것들을 연거푸 보았다. 산보객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고즈넉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강렬한 원색이 아닌 꽃들이 주변의 덜 여문 봄[春] 분위기와 어울려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 3월을 넘기기 전에 연하디 연한 봄 산책을 했다.      


마지막으로 귀갓길에 문 닫은 어느 꽃집 창유리에 쓰인 문구 “How flowers make you happy!”를 휴대폰에 담았다. 꽃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는 당신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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