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2
짚과 새
하회마을엔 초가집도 많다. 나는 그 초가집에서 작은 기척들을 보았다. 흔들림 없는 한옥 기와와 달리 초가집 지붕의 이엉 속 짚들은 단단하게 매어 있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림으로 대응한다. 더욱이 처마를 비롯해 지붕 사방 하단에 자리를 차지한 낱낱의 짚들은 ‘지푸라기 신세’도 누린다. 바람 따라 움직임이 수월한 것이다.
어찌 보면 짚들이 하늘을 매만진다는 생각도 든다. 바닷물 속 바닥에 자라난 수초들이 물의 흐름과 물고기들의 헤엄 덕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지상에서는 바람이 바닷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 바닷물이 흐를 땐 바닷물 덕분에 해초와 바다가, 바람이 불 땐 바람 덕분에 짚과 하늘이 서로를 터치한다.
자발적 움직임이 가능한 새들은 그 터치의 강도가 세다. 특히 작고 날렵한 새들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 꽃가지에서 저 꽃가지로 뜀뛰기 하듯 옮겨간다. 그때 가지는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터치, 또는 촉각을 경험한다. 부리로 자신의 나무눈과 껍질을 쪼아댈 땐 통증을 동반한 촉각을 경험한다. 내 눈이 그 새들의 움직임에 신기해하고 있는 사이.
만남
‘가경재’라는 초가집이 있었다. 고택 못지않게 너른 안뜰을 지니고 있는 ‘가경재’엔, 울타리 자리에 나무나 너럭바위는 있어도 담은 없었다. 대문도 물론 없다. 쌓이다 멋이 배어든 장작더미가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잔디밭도 있고 땅바닥 징검돌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견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두 채 있고 그 안으로 안채가 있었다.
조심스레 뜰 안으로 들어가 잿빛 장작더미를 사진에 담고 있는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짖어댔다. 주인집 개다. 잠깐 놀랐지만 친근하게 눈짓과 손짓을 하니 이내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여행하면서 많은 개들을 만났다. 백구, 흑구, 황구 등 마당에서 키우는 개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매만져주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 여행지엔 관광객은 많아도 그곳의 개들은 왠지 외로움을 타는 듯하다. 터치에 굶주린 개들은 관광객들과 접촉하고 싶어 안달을 내지만, 대부분 고정된 개줄에 매어 있어 행동반경이 제한돼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먼저 조심스레 다가가 경계심을 풀게 한 뒤 어루만져주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마당에서 키우니 몸이 깨끗할 리 없지만 나는 마음껏 애무해 주었다. 손이야 나중에 씻으면 되니까.
‘가경재’ 개는 나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예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개줄에 묶여 있지 않았다. 나는 개의 등과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꼿꼿한 털을 만지니 꺼끌꺼끌함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러니 이젠 개가 나에게 촉각, 촉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 손등과 팔목을 혀로 정성껏 핥아주는 것이었다. 한참을 진득하게. 내가 조금 자리를 옮겨 뜰을 살펴보는데, 이젠 아예 드러눕는다. 개가 자신을 무장해제할 때, 상대에게 무한 친근함을 보여줄 때의 자세다. 나는 마음껏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행지에서 개와 이런 만남을 가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안뜰과 그 너머의 풍경에 매료된 나도 아예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관광객은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내 앞에 호기심 가득 지니고 등장한 새의 울음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흔들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가슴이 아니라 배로 호흡할 때의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걸 듣겠다고 주저앉았으니 나는 새와 바람과 나뭇잎에 감각을 들이민 셈이고 그들은 나의 청각을 통해 내게 촉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잠시 나, 개, 자연 이렇게만 감각을 나누는 호사를 누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가경재’ 개 덕분에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개’에 관한 이야기다. 좀 길더라도 속도감 있게 써보도록 하겠다.
내 학력엔 방송통신대가 있다.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처음 본격적으로 배웠다. 2007년 봄과 여름엔 일을 하지 않고 혜화동 본교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다. 그 당시 방통대 본교는 대대적인 증축공사가 있기 전이어서 교정이 넓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역사관 앞쪽으로 키 작은 나무들을 심어 놓은 미니 숲도 있었다. 나는 이 주변을 자주 산책했다.
어느 날 정문 옆 수위실 앞에 누런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수위 아저씨들이 보살피는 개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그 개 옆으로 가 손을 내밀었다. 더운 날 물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는 그럴 때마다 슬며시 나를 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 같았다. 내향성임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사관 근처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이 개가 내게 다가와 내 옆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는지. 나는 개의 등을 부드럽게 긴 호흡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 후 산책하러 나올 때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신호를 보내면 그 개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눈곱도 떼어주고 마치 수의사라도 된 듯 장난삼아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고서 치아 상태를 살피기도 했다. 지긋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 개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일어나 자리를 뜨면 개는 다시 수위실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위아저씨들이 교내 미니 숲에 모여 무언가를 정답게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들어가 보았다. 세상에, 갓 태어난 그 개의 새끼들이었다! 그곳에 개의 집이 있는 것도 그때 알았다. 순간 이젠 어미가 된 그 개가 내게 달려와 내 무릎 쪽에 앞다리를 올리며 반가워했다. 그 개의 적극적인 몸짓은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새끼들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미를 매만지며 놀라운 시간을 보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새끼 밴 상태인 그 개는 새끼를 보살필 누군가로 나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개의 모성애가 작동한 거라고…… 암튼 새끼를 본 이후로 나는 수시로 그 ‘비밀의 숲’에 들어가 새끼들에게 우유를 먹이곤 했다. 새끼들이 우유를 마실 때 어미는 그저 바라볼 뿐이어서 어미도 마시게끔 이끌기도 했다. 때론 어미를 억지로 드러눕게 한 다음 대여섯 마리의 새끼들을 각각 어미 젖꼭지 앞에 ‘배치’시키고 젖을 빨게 했다. 어미는 그때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때는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새끼들은 몸짓을 부풀리면서, 서로를 물어대면서 커갔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해가 져 어스름한 때, 저 멀리 70미터쯤 떨어진 곳에 어미 개가 보였다. 나는 손바닥을 크게 치며 나의 존재를 알렸다. 그랬더니 해산 후 몸이 가벼워진 어미는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내게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마음껏 배를 애무해 주었다. 개와의 우정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개가 시무룩해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새끼가 한 마리씩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위아저씨들이 새끼들을 도맡아 키울 수는 없을 테니 누군가의 손에 한 마리씩 넘기곤 했을 것이다. 개는 우울에 빠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짖어대기까지 했다. 나도 슬펐다.
그러다 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동안 개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학교 내 자판기를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그 개를 데리고 가 중성화 수술을 시킨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개 짖는 소리를 싫어했다. 개가 자주 새끼를 배고서 교정을 돌아다니는 것을 염려했다. 그때 내 짐작으론 영업 차원에서 학교 측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자비를 들여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한참 후 그 개와 다시 만났다. 내가 다가가니 등과 배로 널찍하게 붕대를 감은 개가 천천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생전 처음 목욕을 했는지 몸은 아주 깨끗했다. 나는 쓰다듬으며 위안을 해주었다. 그 개는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을까.
그것이 그 개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다시는 그 개를 볼 수가 없었다. ‘사진 한 장 찍어둘 걸’ 속으로 그랬다. 여전히 그 개는 내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개로 남아 있다.
행복한 손
‘가경재’ 안뜰에서 이 집 주인인 노부부가 인기척을 냈다. 외출 채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순간 ‘가경재’ 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안채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돌아나가는 길, 분꽃 향내도 맡고 풍경을 만들어 파는 집에서 풍경 소리도 들었다. 별스럽지 않았다. 이날따라 한옥 저택도 그저 그만인 흥미로만 다가왔다. 개와의 만남, 촉각, 새소리, 짚과 하늘의 터치만 주된 기억으로 남았다. 프랑스어 단어 ‘toucher’엔 ‘촉각, 촉감, 터치’라는 뜻(명사)과 ‘만지다, 터치하다’(동사)라는 뜻이 같이 들어 있다. 영어의 ‘touch’도 그렇다. 주로 손의 행위를 일컬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젠 떠날 시간, 하회마을에서 눈과 귀뿐 아니라 내 손도 행복했다. 다시 하기 힘들 ‘가경재’ 개와의 만남.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이제 내 발길은 병산서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