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병산
나물을 자주 먹는 나는 방풍나물 반찬을 잘 사다 먹는다. 맛이 쌉싸름해서 입맛이 없을 때 먹기 좋다. 방풍(防風)나물은 풍을 예방해 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람 풍(風)’ 자엔 ‘감기, 중풍’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병산서원의 ‘병’ 자는 ‘병풍 병(屛)’ 자다.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건축물 ‘만대루’의 맞은편 산이 병산인데, 모양새가 병풍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거대하고 길쭉한 누각 만대루에서의 시선을 사로잡는 열두 폭 병풍이다.
병풍은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과, 그림과 글씨가 들어간 장식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병산도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데, 특이하게도 양반집 사랑방의 앉은뱅이책상 뒤 병풍과 달리 책상 앞에 위치하고 있다. 병산서원을 향하는 남쪽 바람을 막아주는 병풍이자, 볼수록 아름다운 장식의 병풍이다.
‘만대루’(晩對樓)는 한자어 뜻처럼 “늦은 오후 마주 대할 만한” 병풍을 바라보는 최적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 탁 트인 경관을 조망하는 자리로 삼기 마련인데, 만대루는 난간에 팔을 기대거나 누워서도 감상할 수 있는 병풍 같은 산, 강, 백사장을 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병산서원에서 만대루는 강의를 하거나 서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도산서원엔 휴식을 취하는 마루는 있어도 만대루 같은 조망을 전담하는 건축물은 없다. 굳이 병산을 앞에 두고 서원을 지은 목적이 있을 것이다. 병산이 호사스러운 자연 병풍이기 때문 아닐까.
원근감
늦은 오후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네 시 너머 만대루에 도착했다. 20년 전 나도 이곳 만대루에 올라앉아 직사각형 공간에서 파노라마 같은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현재는 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금하고 있어 많이 아쉬웠다. 누각 뒤에서 기둥 사이로 분할된 화면들을 넘겨다 볼 뿐이다.
그렇지만 위쪽 강당 건물 ‘입교당’(立敎堂)에 앉아 만대루와 병산, 균형 잡힌 좌우 건물을 내려다보는 운치도 만만치 않다. 한참을 앉아 마당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조화로운 배치를 보고 또 보았다.
간혹 다른 관람객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자 하면 자리를 비켜 오른쪽에 위치한 ‘서재’(西齋) 툇마루에 앉거나 입교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람객이 가면 다시 입교당 마루로 돌아와 또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입교당 뒤쪽에 열린 문을 통해 원근감 짙은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화가가 원근법을 사용해 내보이는 작품을 나는 이 문 덕분에 폰 카메라에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입교당 마루, 만대루, 입구에 해당하는 복례문, 모래사장, 병산이 터널 안을 바라보듯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선을 좋아하는 내게 원근감 있는 풍경은 메인 시선 요리감이다.
만대루에서야 진정한 병산 풍경을 만끽할 수 있지만 조금 높은 곳에 지어진 입교당 뒤쪽 문에서는 만대루마저 풍경의 일부가 돼버렸다. 현실에 좌지우지되는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찬찬히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라고 할까.
안팎의 조화
그렇게 병산서원 안은 어디서든 여유로움이 얕은 세기의 바람 앞 파도처럼 차분하게 넘실거렸다. 입교당과 ‘동재’(東齋) 사이 뒤쪽에서 바라보는 병산서원의 측면 모습도 그러하다. 서원 안과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또한 위 입교당의 팔작지붕과 아래 동재의 맞배지붕의 끝부분은 바짝 붙어 있지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그 모습이 일정한 마음 간격을 유지하며 사랑에 빠진 연인 모습 같다.
나는 서양식 주택과 한옥의 특성 차이 중 하나를 대문에서 본다. 아파트, 빌라를 비롯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식 주택의 현관문은 거의 다 안에서 밖으로 밀어서 열도록 돼 있다. 거주 공간을 좀 더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 외에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옥의 대문은 안으로 잡아당겨 열도록 돼 있다. 그래서 방문객은 비껴서는 일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대문 구조에서 뭔가 너른 품새를 느낄 수 있다. 나, 또는 나의 집을 개방하는 데 있어서 경계심이 적은 모양새다. 서쪽으로 지는 해의 빛살도 막힘없이 들어온다.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이런 자세로 마음을 열면 그 만남은 더 정답지 않을까.
마루
병산서원엔 다양한 마루가 존재한다. 입교당의 가운데 대청마루를 큰 마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감히 신을 벗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이 큰 마루 맨 앞에 앉곤 했다. 입교당의 왼쪽 방 앞에는 폭이 아주 좁은 쪽마루가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와 서재 역할을 하는 동재와 서재는 툇마루가 널찍해 여러 사람의 거동이 용이하다. 나는 서재 툇마루에 앉아 캔커피를 야금야금 마시곤 했다. 캔커피를 차(茶)로 여겨 어색함을 덜어냈다. 늦은 오후 햇살을 잔뜩 받고 있는 동재의 툇마루는 안온하기 그지없다.
역시 이곳의 대표 마루는 만대루의 누마루다. 누각의 마루인데 다락마루라고도 한다. 만대루 밑에는 여덟 개의 다듬질 덜한 통나무 기둥이 있다. 그러니까 마루는 떠 있는 공간이다. 밑이 빈 공간이다. 대청마루나 툇마루도 바깥쪽은 받침대가 있어도 안쪽은 비어 있다. 마루의 사전 풀이가 “집채 안에 바닥과 사이를 띄우고 깐 널빤지. 또는 그 널빤지를 깔아 놓은 곳”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마루는 평면이지만 그 위에서 사람들은 무언가의 활동으로 입체적 또는 창의적 공간을 만든다. 유생들이 학문에 전념하던 곳을 불쑥 찾아온 나에게 병산서원의 마루는 쉬어가는 벤치가 돼주었다. 자석으로 당기듯 자꾸만 앉고 싶은 마루였다. 마루에 앉아 깊은 생각 하지 않고 건축물과 자연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가 나를 풍경의 하나로 보지는 않았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걷기 예찬
외딴 시골에서 자란 여러 작가들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학교까지 십여 킬로미터 걸어가는 것은 당연지사로 나온다. 날아다니는 일로 일생을 바치는 철새들처럼 초등학교 시절 작가들은 인적 드문 길을 그렇게 걸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주인장 고도원 님은 『고도원 정신』이라는 책에서 왕복 여섯 시간 걸리는 등하굣길이 담력과 체력과 결기를 키우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20년 전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은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왕복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그렇게 병산서원과 첫 대면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도로는 포장돼 있지만 단선 도로이고 시골길이다. 저녁 서울행 열차를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하회마을에서는 택시로 병산서원에 갔지만 나올 때는 걷기를 선택했다.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걷기 예찬』이라는 책이 있다. 걸어서 행복을 경험한 이들을 문학적으로 칭송한 책이다. 오래전 밑줄 그으며 읽은 그 책은 나의 걷기 횡보에 맞장구를 쳐주는 고전이 돼주었다.
가다가 나무와 꽃들을, 그리고 저 밑 비가 오지 않아 너비가 좁아진 낙동강 물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걷기엔 이력이 난 지라 가끔 시계를 보며 옛 추억을 되살리며 걸었다. 낙동강 물은 나의 걷기 방향과 반대로 하행하는 중이다. 동북쪽 도산서원과 안동 시내를 거쳐 내려온 낙동강 물은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우회한 다음 아주 먼 길을 거쳐 부산 근처 남해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어린 시절 걸어서 통학했던 이들처럼.
삼거리에서 버스로 안동역에 도착해 창구에서 표를 끊고 탑승. 청량리에서 열차를 탈 때처럼 출발 5분 전이었다. 나는 그렇게 겨우 ‘노아의 방주’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