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를 부르는 떨림, 이름

그 떨림을 잊은지 오래되어

by brwitter

하나 둘, 쌓여가더니 어느새 나를 부르는 호칭이 양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버렸다. 강의장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강사님`, `교수님`, `선생님`, `쌤`, 때로는 나를 운영 지원팀과 혼동하여 부르는 `OO님` 등등... 회사는 스타트업의 트렌드를 따라 영어 닉네임을 정하고 부른다. 그마저도, 신입 때는 강의 경력이 없어 강의를 들어가지 못해 - 기초 강의인데 강의 경력이 없어서 강의를 못 들어가는 - 부득이 남의 이름을 빌려 강의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빌린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낯설거나 그로 인해 오는 괴리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외에도 나는 이미 무수히 많은 호칭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온라인 세상에서 불리는 닉네임. 혹은 기고 사이트에서 쓰는 필명 등. 이미 내 이름 이외의 방식으로 내가 불려지는 것에는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호칭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역시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에 자괴감을 느끼거나 그 사실에 너무 괴로워하며 버틸 수 없어 회사를 그만둔 직장 동료도 있었다. 당시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며 강사를 연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걸까? 그 호칭이 무엇이든 상대방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 텐데 거기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라며 살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지인의 글을 읽게 되었다. 항상 참 많은 영감을 얻게 해 주는 친구다.




나는 핸드폰에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저장할 때면 항상, 다른 수식어 없이 이름 석자만 기록한다. 그 사람의 소속 등은 그룹으로 나누어 관리한다. 가끔 동명의 지인이 생기게 되면 번호를 붙이거나 소속을 표기하여 구분한다. 정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물론, 나는 반박하고 싶다. 내 나름의 그 사람을 소중히 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름 석자만큼 그 사람을 잘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내가 내 이름 석자를 잃어가고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에는 친구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저장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니다. 가끔, 몇몇이 너무 삭막하다 하소연을 하면, 성을 떼고 이름만 남기는 정도로 타협을 보기도 한다.


"근데 이렇게 저장해 놨다가, 나중에 성을 까먹으면 그게 더 서운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더 잘 기억하라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요? 이름만 저장해 놨지만 성도 기억하는 정도의 다정함. 그 정도의 따듯함이면 전 충분해요."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가끔씩 전화번호부를 정리하며 성을 떼고는 한다. 딱히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기분이 들 때면 그렇게 하고 있다. 내 나름의 소소한 애정 표현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겠지만.




나는 학기가 시작될 때면 나를 소개하면서 내 이름을 장난스레 소개한다. 이 일을 하기 시작한 이상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개발자로 살아가면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야 할 이름이기에,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라고. 그만큼 좋은 강의를 하겠다는 포부이면서 동시에 나름의 다짐이기도 하다.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강의를 해 주겠다는 다짐. 잘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학생들에게 "영원히 날 잊을 수 없을 거야, 크큭"이라는 느낌의 저주를 걸지만, 정작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그렇게 잘 외우지는 못한다. 정확히는 자연스레 익혀질 때까지 방치해 둔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기억하고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며 친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너무 깊게 관여해 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곁을 떠날 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빠져버리고 나면,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학기가 오기 전까지, 나는 하염없는 상실감에 빠지고는 한다. 이름을 잘 외우지 않으려는 것은 어쩌면 매번 순환되는 상실감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A가 나를 내 이름으로 더 많이 불러줬다면, 그래서 내가 정으로서 떼기 어렵게 붙어있었다면 이 끝이 유예되었을까.


얼마 전 보았다는 친구의 글 중 한 구절이다. 그들도 나를 `강사님`, `선생님`, `교수님`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줬다면, 이 관계가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맞지 않는 투정을 부려본다.




앞서 말했듯, 나는 나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호칭에 따라 그에 적합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강사로서, 친구로서, 글쓴이...? 로서, 그 각자의 떨림에 맞게 나를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제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또 다른 나 자신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어쩌면, 강사라는 호칭이, 회사에서 불리는 그 영어 이름이 나를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어느 순간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이름으로 불릴 때 어떤 모습으로 대해야 할지 알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무수히 많은 이들의 이름을, 그들을 부르는 떨림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정작 나는 그 떨림을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흐릿해져 간다.

그 작은 떨림이 듣고 싶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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