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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witter Aug 21. 2023

누구를 위한 삶인가 - 3

저 갈 수 없는 구름 위에 꿈 하나를 던져놓고

 이야기는 이직을 하기 몇 달 전으로 살짝 돌아간다. 작년 이 맘 때쯤,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어 한창 학생들도 들떠있을 때 즈음, 한 학생이 DM으로 질문을 보내왔다. 평소와 같은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내용이었다.


 "교수님, 혹시 저희 회식하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참여 가능 하실까요?"


 성인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을 하고 있다 보면 늘 듣는 이야기다. 회식에 참여해 주실 수 있느냐는 정중한 질문. 그러나 나는 이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계약으로 묶여있는 몸이요, 애초에 사적인 자리에 강사의 몸으로 자리에 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학기가 끝난 상황이라면 모를까, 학기 도중에라니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은 딱딱하지만, 정석대로 답변을 작성하여 보냈다.


 "죄송하지만, 사적인 자리 나 만남에는 제가 낄 수가 없어서 용. 조금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회식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용. 과음하지 마시구, 즐겁게 놀다가 오세용!"


 최대한 딱딱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 비장의 용용 체도 써봤지만, 역시 선을 긋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FM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긁어 부스럼이다. 학생들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적인 회식자리에서의 술을 사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수업시간에 잘 참여한 학생들에게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줬으면 모를까. 그렇게 덤덤히 넘기고 가려던 중, 내 자리로 방금 DM을 보낸 학생이 쭈뼛쭈뼛 찾아와서는 "옆 반 강사님은 회식 오셨다던데... 절대 사달라는 뜻은 아니고 오시면 같이 밥이나 한 끼 하고 싶어요." 그 이야기에 우선은 가볍게 웃어주고는 고민해 보겠다며 넘기고 수업을 진행했다.


 '알고는 있었잖아?'

 '모르는 게 이상하지. 우리 회사 사람들도 주기적으로 회식한다거나, 반 전체도 아니고 몇 명만 모여서 밥을 사준다거나 하는 이야기들도 들었으니까.'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이상한 거야? 학기 끝나고 나서 회식하잖아. 근데 사실은 학기가 끝나더라도 그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안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약속받은 회식날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음날 역시 회식은 안 되겠다는 말을 전했다. 대신, 그동안에는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었지만 이번만큼은 '학기가 끝나면 저는 교수 아닌 거 아니에요?'라는 식의 답변만 넌지시 던져주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학생들은 만족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일은 이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다 똑같은 거라고, 하루 온종일 붙어지내다보면 얼마든지 친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더 많은 자리에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운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체로 이해하였다. 그 회식자리 한 번을 참여하지 않았다고 끊어질 라포도 아니었거니와 학기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더욱 돈독해지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아쉽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른 반은 해 준다는데... 그 회식 한번 몰래 나가는 게 뭐 어떻다고...'

 '그 한 번 나가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닌 걸 알고 있다면,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는 거잖아? 수업만 잘하면 된다며?'

 '그것도 그렇지만서도...'


 어쩌면 나는 학생과 강사의 관계보다 조금 더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 더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그런 동질감.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일절 없다 보니 더 그런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나에게 수업을 듣고 있는 이 학생들이 나와 같이 본래의 전공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한 학기 말이 되었고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생들과 종강 파티를 보냈다. 수업 시간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나, 혹은 면담 때는 하지 못했던 조금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고, 새벽 늦은 시간 해변가를 한 참을 거닐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또 생각에 잠기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이 때는, 이미 학기도 끝났으니 학생들이 나의 나이도 알게 되었고, - 원래는 나이도 알려줘서는 안 된다. 학생들과 나이가 엇비슷하다 보니... -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고민들을 터울 없이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처럼 수업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FM처럼은 못 할 것 같습니다."

"FM요? 제가요? 저는 수업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공부는 여러분들이 하신 거죠."

"그러니까, 저는 그런 말을 못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말이야 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물론, 그래서 좀 서운 할 때도 있었습니다. 뭔가 저희가 매번 감사함을 전해도 교수님은 살짝 저희랑 거리를 두시는 것 같았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니까, 앞으로의 삶은 네가 알아서 살아가라. 그리고, 이제 안녕이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그래서 사실 저희도 중간중간 매번 회식 때마다 교수님 부르고 싶었었는데, 뭔가 교수님 회식자리에서 만나게 되면 아, 이제 안녕이구나. 이제 교수님이랑 뭔가 할 수 있는 시간은 끝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연락 못 드렸습니다. 혹시 서운 하실까 봐, 이제야 터놓자면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습니다."

"... 뭐. 오늘 이렇게 봤잖아요? 그리고, 안녕이 어딨 나요. 제가 뭐 어디 멀리 갑니까?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근데, 전 늘 이렇게 말하지만 아휴, 수업 끝나면 다들 제 갈길 가느라 바빠서 아무도 연락 안 하더라고요. 늘 그랬습니다. 하하"


 그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일들에 대한 반항심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이제는 매번 반복되는 지루한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나는 조금 더 생각에 잠긴 채 올 해를 맞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약서상의 이유로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은 강사로서의 자격지심에 의해 내 몫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시시덕거리면서 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고 생각한 걸까. 그동안의 학생들을 대할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머릿속에 맴도는 그 한마디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옆 반 강사님은 오셨다는데..." 그동안 몇 번이고 들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그럼 옆반 가십쇼!" 라고 웃으며 넘겼던 이야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크게만 다가왔다. 어찌 되었든, 나는 또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였고, 새로운 학기를 위한 수업을 진행하였고, 이번에도 같은 일이, 단지 이번에는 조금 빠르게 일어났다.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었을 무렵, 학생에게서 또 DM이 온 것이다.


 "교수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 회식 중인데 오실 수 있나요?"

 "저는 사적으로 여러분들 만나면 안돼요..."

 "애들이 보고 싶어 합니다."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학기까지만 수업을 진행하고, 이제는 퇴사할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학기를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학기 학생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이게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무나도 서운해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계약을 어기고 학생들과의 회식자리에 학기 초부터 자리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1차를 끝마친 학생들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채 살짝 흥분한 채로 들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까지 학생들의 이름도 채 다 외우지 못했을 때, 마스크만 쓰고 있던 모습만 보다 술에 취해 불콰해진 얼굴을 보고 이름을 대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며, 공부 얘기도, 진로얘기도, 술자리에서 가지기엔 조금 답답한 이야길 지 모를 이야기들도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나는 어느새 그들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매 학기가 시작할 때면, 6개월 뒤 보내야 될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처음부터 너무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매력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도록 정을 주지 않으려 했었던 내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척했던 것 역시, 그들 하나하나를 하나의 객체로 기억하였을 때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워 차마 외면했던 무의식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또다시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는 딱히 회식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나는 학생들과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의 반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단순히 회식에 참여했다는 것 만으로 그렇게 바뀐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서도, 어찌 되었든 반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화사하고 정겨웠다. 그렇게 나의 마음 한편을 막고 있던 댐은 그 한 번의 작은 일로 균열이 생겼고, 그 작은 균열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와르르 무너뜨리게 만들었다.


 '사람과 친해지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어.'

 '정확하게는 잊고 지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나와 꼭 맞는 성향의 사람과만 친해지려고 했던 과거의 내가 아쉽게 느껴져. 모두가 모두 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 하나 하나와 가까워질 기회를 그동안 내팽개치고 살았던 게 아닐까?'

 '그게 비단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들 하나하나를 각자의 고유 객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매력이 있어. 그중에 유독 끌리는 마치 북극성처럼 빛나는 친구도 있었지.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걸까?'

 '글쎄, 나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인지라, 이게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하기 어렵네. 아니 정확하게는 사실 이미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 아닌 신념 같은 것을 이미 깨버렸으니,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틀린 판단을 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럼, 지금이라도 수습해 보는 게 맞지 않을까?'

 '할 수 있다면.'


 이미 한 차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미 기존에 학생들을 대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명확히 하자면 수업을 진행한다기보다, 학생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 지나갈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비즈니스적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강사 평가는 이전과 동일했고, 특별히 계약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적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렇기에 사적인 자리가 아닐까. 거기에 덧붙여, 특별히 문제 될 만한 일을 만들지는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나의 마음이었다.

 그럭저럭 대면대면하게 보내어도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나의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 해 질 때로 망가져 있다. 학생들이 어디로 솟구치거나 어딘가로 꺼져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미 그들을 보낼 준비를 하나 둘 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강의장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자리를 정리하고, 사용했던 PC를 밀어버리고, 학생 한 명 한 명과의 DM과 성적표, 면담 내용들을 곱씹어 보며 편지를 썼다. 손 편지도 아니고, 그리 길지도 않은 짧은 타이핑 몇 자지만 그렇게 나는 매 학기 마음을 정리하면서 나의 감정을 달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금방 복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결국 다음 학기가 되면 다시 반복될 것이고, 그리고 그 자리에 아직 강의장을 떠나지 않은 학생들과 다시 대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지막이었다. 이곳에서 강의를 하는 마지막이 될 참이었다. 회사를 떠나고, 이직을 하게 되면 다시는 이 강의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매 기수 매 학기가 끝날 때면 기계적으로 내뱉었던 멘트를 또다시 내뱉으며, 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간에는 장난 삼아 말했던 "저 학기 끝날 때 애들 울리는 재미로 수업해요. 오로지 이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이야기들이 이번에는 차마 입 박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진중한 마음으로 한 자 한자 꾹꾹 눌러 담아 마음을 전했다.


강사 OO로서의 프로그래밍 강의는 오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제 강의의 마지막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후련했다. n 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의장 바깥에서는 우여곡절이 잔뜩 있었지만, 내 강의장 안으로 그 일들이 흘러들어오지 않게 부단히 도 노력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탈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그동안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끝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준 모두에게 너무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빠르게 자리를 떴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이미 진즉에 정리가 끝난 자리에 앉아 학생들이 강의장을 벗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

'아마도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나를 붙잡아 주기를 바랐던 마음 아닐까?'

'...'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내 의지가 아니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정들었던 강의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과 그 어느 학기보다 깊은 매력에 빠져버린 지금의 이 순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그간 바라왔던 학생과 강사 사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랐던 마음이 남았었던 것 같다. 내가 강사로서 이들과 마주하지 않고, 저들과 같은 학생으로 함께 자리했다면 지금의 나보다 그들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저들과 나 사이에 있는 이 알 수 없는 장막은 무엇으로 걷어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 거리감 역시도 결국엔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쯤 생각이 들자 또다시 나를 옥죄어 오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강사가 하고 싶은 거 맞아? 애초에 처음 이야기 했던 교육에 대한 이상과는 이제 어느 것도 하나 맞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지식의 전달자로서, 학습을 위한 매개체로서, 학생들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마음은 이제 단 하나도 안 남아있고, 그냥 돈 많이 벌면서 웃고 떠들고 싶은 마음 밖에 안 남은 것 같은데?'

 '강의는 강의대로,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로. 안 되는 거야?'

 '안될 건 없지. 하지만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지. 그리고 처음 이야기 했던 그 이상과 신념을 지킨다는 한도 내에서 한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왜 그래야 하지? 선생이라고 하는 직업이 그렇게나 신성시되어야 하는 일인 걸까? 그냥 한 명의 사람일 뿐이지 않을까? 직업적으로 지켜야 할 본분은 다 지키면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지키면서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냐?'

 '갈 수 없는 구름이야. 헛 된 꿈이고.'

 '왜지? 아직도 그 치기 어린 마음이 선생이라는 직업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신격화하고 싶은 건 아닐까? 이상적인 신념이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 그걸 지키고 있는 나라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던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 미술학원에서 일을 할 때, 나를 두고 만들어졌던 그 허상의 이미지들을 사실은 내심 기뻐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다른 강사들을, 직장 동료들의 수준을 모욕하던 대표의 말에도 크게 반박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나를 차별화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대단한 나를 만들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렇게라도 해야,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었으니까.'

 '충분한 임금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 분에 겨울 정도의 수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그것 이외의 어떠한 이유로 직업에 대한 보상을 바랐던 거지? 학생들에게서 얻는 존경심?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 아니면 나를 떠받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 나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다. 칭찬은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평가도 보상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지? 누구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지?'


 내가 만족할 수 있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내가 즐거운 것이라면 되는 것 아닐까? 왜 내가 행복해지는 길에 내가 닿을 수도 없는 이데아의 모습을 그리면서 나를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거지? 왜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을 꿈꾸면서 그게 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지? 남들의 인정을 받아들이고, 나의 수준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행복하고 만족하고 살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직업이라는 방호벽에서 꺼내어진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의 나는, 어느 것 하나 준비되지 않은 벌거벗은 아이에 불과했다. 그 마저도 잘 가꾸지도 못한 허름하고 너덜너덜한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제야 한 발자국 정도 더 알게 된 나 자신의 바람을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길이 결코 평탄치만은 않은 길이었고, 오랜만에 내 발로 직접 내딛는 길이었기에 너무나도 엉망진창에 위태로웠지만 그렇게 남이 만들어놓은 우상에 깃대지 않고 내디뎌 보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프로그래밍 강사로 이직하였다.


-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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