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한 순간 기쁨 한 순간 모든 건 다 영원할 수가 없다는 걸
그렇게 그 간의 나의 행보는 누구를 위한 삶이었는가를 생각하며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 여러 갈래길을 돌아보며 고민하였다. 한 번 더 '믿을만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것인가, 혹은 나 혼자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수업과 관련된 일을 제외한 것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고, 그 마저도 나의 행동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르는 일들 - 법적으로 문제가 될 일들 -에 분개하며 회사라는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은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면, 나 혼자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앞길이 막막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겨나고 있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더욱 많아지겠지만, 적어도 나 이외의 변수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는 적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변에 꽤나 많은 조언을 구해 보기도 하였다.
다행히도, 프리랜서 강사를 이미 진행하고 있던 직장동료가 있었고, 개인 사업자로 활동 중이신 컨설턴트님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다양한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그 길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는 짧게나마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현 대표님의 연락을 받아 감사하게도 그분과 함께 연을 이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즉, 다시 직장인으로서 강사를,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대표라는 직함에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OO과 나눴던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강의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만 서로 갖출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혼자 수업을 해오면서 너무 힘든 일도 많았고 불안정한 경우들도 많았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모두가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배울게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제 사수님이 그런 말 하시면 부담스러워요. 우리 같이 만들어봐요."
그 말이 감언이설에 불과할지, 아니면 정말로 지켜질 유토피아일지는 아직은 판별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함께 하기로 한 구성원들을 들었을 때, 실망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을 떠나서 아직은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회 초년생인 나이기에 내가 직접 어떠한 일에 참여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남을 위한 무언가보다, 오로지 나를 위한, 나의 성장을 위한 결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더 많은 강의를 보고, 더 많은 내용을 학습하고,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볼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반복되기만 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조금 너무 들떴던 걸까...
이야기는 잠깐 옆길로 새서, 일 이외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과 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을 대하는 법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다. 익숙해진다기보다는 숙달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학생 -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의 주 고객 - 을 대하는 것에는 익숙해져 그들을 위한 행위가 무엇인지,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인지는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심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거지?'
'진심이요? 검색해 보니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라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진심이었어.'
'그런 조언이나 격언, 첨언들을 해주고 있는 당사자가 정작 그런 사탕발린 말에는 별 감흥이 없는데 말이지?'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하는 말들이 과연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알마나 힘이 될지 모른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그냥 그간 쭉 봐왔더니 대충 이 때쯤에는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더라, 대충 이때 즈음에는... 이런 말들이 힘이 되는 것 같더라.라는 생각에 해주는 이야기들이지.'
'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는 본인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그 이야기들은 나중에 따로 모아보도록 하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학생"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강사'가 지녀야 할 몸 가짐, 행동, 말버릇,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은 본연의 나를 표현하였다기보다는 그럴듯하게 잘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잘 지켰느냐?라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아무튼. 뭐,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느라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과하게 들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 길다. 더 얘기해 봐야 변명만 늘어놓을 것 같으니 말을 줄이자. 짧은 연애를 하였다. 일에만 치여 살던 중, 맞이한 기쁨과 사랑은 새어 나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랬다. 너무 들떴다는 말의 의미 중 하나는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다. 참 밝게 빛나는 친구였다. 그렇게 혼자 들뜨고 말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런 나의 들뜬 마음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중간이 없어 사람이...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런 들뜬 마음은 비단 내 개인 정서에서만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기반을 어느 정도 잡아갈 때 즈음 무너져버린 전 직장을 벗어나 다시 처음 토대부터 다져야 하다 보니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전 직장에 입사했을 때 했던 일을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했다.
'근데 지금 하는 이 일. 그동안에도 똑같이 했었던 일이잖아?'
'그렇지? 커리큘럼을 조금 손보긴 했지만, 대체로는 큰 변화 없이 해오던 일이었지? 문제를 새로 만들고, 오탈자 검수하고, 버전 업데이트 확인하고...? 단지 양이 조금 많을 뿐이라는 점?'
'근데 뭔가 기분이 다르지 않아?'
'확실히 뭔가 다른 기분은 드는 것 같아. 똑같이 밤잠을 줄여가면서 새벽까지 일을 했어도,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일을 했어도, 뭔가 덜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이게 그 자기 효능감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아니, 그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에 가까운 거고, 그런 것보다는 내가 만든 산출물이 곧 결과물이 된다는 점에서 오는 성취감에 더 가까운 일이겠지? 그리고 다른 것보단 그동안은 사실 무슨 일을 하던 아무런 피드백도 못 받았었던 게 가장 큰 고통이었지 않았을까? 내가 잘했는지, 못 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 지방에서 혼자 근무하고 있었던 점도 크고, 소통도 힘들었고 여러모로.'
'타지의 기준이 이제는 서울 이외가 타지가 되어버린 기분이네. 그래도, 어쨌든 그런 과정 속에서 일을 하게 되니 이전보다는 낫다는 거지?'
'그치, 야근 수당이니 뭐니 따지기 이전에, 내가 열심히 준비한 만큼 다음에 만나게 될 학생들에겐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잘 정리된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는 게 제일 큰 것 같아.'
'좋네.'
그렇다. 애초에 새 교재 작업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커리큘럼, 더 나은 교재를 만들고 싶어 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막혔던 것이니까. 다만 문제는 그렇게 행복하게 일을 끝마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아주 조금이나마 작업하고 있었던 교안과 각종 수업 준비 자료들을 완전히 갈아엎고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전에 하던 수업과 다른 수업을 하게 됐는가? 그건 아니다. 그럼 이전에 하던 수업의 커리큘럼이 크게 변동하였는가? 그것 또한 아니다. 그럼 무엇을 그렇게 새로 만들어야 했는가? 교안부터 실습과 평가에 과제까지 모두 처음부터 전부 만들어야 했다. 왜...?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서... 전 직장에서 교안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들먹였기 때문이었다. 왜 교안의 저작권을 본청이 아닌 하청이었던 전 회사가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하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갈수록 더욱 수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교안의 저작권에 대한 인수 비용을 수 억 원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그동안 수업을 진행하면서 있었던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교재는 저작권을 이유로 학생들에게 나눠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저작권은 당연히 우리 회사가 아닌 본청이 가지고 있는 줄 알고 본청을 욕했었다. 도대체 교재를 안주는 강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웹 페이지만으로 교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교재를 내려받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다운 받는 방식으로는 불가능 하니 별의별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 이게 실전 압축형 프로그래밍...? 이유? 알 수 없다. 이미 남이 되어버린 분의 뜻을 어찌 헤아리리오. 문제의 답안은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풀이를 하는 것은 되지만 답안 제공은 안되었다. 그 풀이마저도 회사 업무 - 다른 문서 작업 - 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하는 것을 장려했다. - 물론... 딱히 지키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엔 수업하고 문서 작업은 퇴근 후에 작업하는 게 속이 편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모든 문서는 같은 강의를 하는 외부 업체에게는 공유해 줄 수 없었다. 모두, 본인의 소유물인 교안에 대한 저작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니...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야 하는 마당에 교안의 저작권이 문제라니, 대체 이게 무슨 생각인가?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로 작성하게 될 교안에서 이전 교안과 유사성이 있으면 법적 소송에 들어갈 수 도 있다"라는 이야기마저 당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아니, 이론을 본인이 만들었나? 커리큘럼이 비슷한 걸로 무슨 소송을 걸겠다는 건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들...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다 갈아엎어버리기로 했다. 처음부터 다 만들기로 했다. 그게 서로 맘 편하겠지.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게 더 득이 되겠지.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은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내가 너무... 삶을 안일하게 살아왔던 걸까?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나?
그런 일련의 사건이 있고 나서 분개해하는 강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착잡한 마음은 있지만,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서 만든 자료였는데, 왜 그 자료로 개인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건가요?'라는 말을 밖에서 꺼내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기업이 구성원의 산출물로 수익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껏 전 회사의 악행(?)을 쏟아내어 보지만, 그걸 과연 잘못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는 일일까? 그걸 내가 판단해도 되는 일일까?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이런 얘기들을 여럿 선배님들이나 조언을 구할 분들께 하고 있자면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비슷했다.
"더럽고 치사한가요?"
"네. 기분이 많이 나쁘네요."
"학생들을 위해서 만든 자료들이 누군가 주머니 속 채우는 용도로 쓰이는 게 싫어요?"
"그것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냥 뭔가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 맞은 기분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어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죠. 근데 그런 거로 하나하나 일희일비하고 있기엔 해야 할 것도 너무 많은데 그런데 시간 낭비하는 건 아까운 것 같아요. 차라리 그 시간에 그렇게 학생들을 위한다면, 더 좋은 자료를 내가 만들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되면 되지 않을까요? 이제 시작했잖아요? 세상은 넓고 일은 많아요. 경험을 쌓았잖아요? 지식은 머릿속에 있잖아요? 다시 꺼내서 쓰시면 돼요. 잘하시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새롭게 시작 한 다는 기쁨도 잠시였다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빠졌었던 것도 잠깐이었다. 지금은 어찌 되었든, 그때의 일련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또 잘해나가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지금은 어찌 되었든,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속된 말로, "꼬우면 네가 하던가."를 실천할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게 내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번에는 서울에 체류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다시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 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