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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이스와 줄리 Aug 21. 2017

'만약'을 떠올리다 문득

휴가기간 이삿짐을 정리하던 도중 만난 생각

입사 후 첫 공식 휴가를 얻었다. '연차'를 소진하는 개념이다. 주말을 포함해 총 7일의 귀중하디 귀중한 휴가를 보내게 됐다. 쉼은 늘 옳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다. 하루가 떠나보내기 아쉬울 만큼.


마침 휴가를 떠나기 2주 전 우리 집은 오랜만에 이사를 했다. 우선 급한대로 쌓아둔 짐을 이사한 지 3주가 지난 지금에야 정리했다.


이사를 하고나면 하는 일이 있다. 여전히 배치할 수 없는 짐을 버리고, 쓰지 않는 물건을 치우고, 버리긴 아깝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책을 점검하는 일들이다. 오늘은 책장을 바꾸면서 몇 안 되는 나의 책들을 재배열했다. 책을 보기 좋게 책장에 줄지어 세워놓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다 내가 정기구독하는 주간지(한겨레21)를 순서를 맞춰 다시 꽂았다.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많은 양의 종이들을 읽었나 싶었다. 구독을 결심해 엄마의 카드를 빌려 신청을 할 즈음에는 백남기 농민이 살수차의 물대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셨고, 취업이 될지 말지 몰라 불안해 하던 1년 뒤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힘이 모이고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9개월이 지난 지금, 주간지 상에선 적어도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특히 주간지들은 표지를 통해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한 주의 이슈를 담아내려는 경우가 많다. 정치부 기자가 된 뒤에는 주간지 내용을 훑어내기도 바빴는데, 이렇게 다시 오와 열을 맞춰 하나하나 정리하다보니 지나온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 지금까지 고작 8~9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일어났구나' '나는 그대로 정치부 기자가 되고 만약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이 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 나라는 박근혜정부와 함께 올 연말 치러질 대선을 향해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겠구나'  


사실 좀 섬뜩한 일이었다. 지금은 문재인정부가 당연한 이름이 됐지만 불과 100일 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적는 것 조차 어색했다. 문재인 후보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무려 5년 전에도 후보로 불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문통'이 더 입에 붙고, '박통'은 어색하다. '박근혜'라는 이름조차 어색해졌다. 만약 박근혜정부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그 주간지의 표지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런 '만약'을 떠올리는 일은 그렇게 쓸모있는 상상은 아니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다만 내 생각을 점검해보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전례 없는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5월 대선이 열리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니까.


휴가 기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만약을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이슈를 처리하고, 현재 벌어지는 상황들을 파악하고 내보내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따금은 만약을 떠올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종종 나는 현재의 일들을 마구 쫓아다니다 무기력을 느끼곤 했다. (별로 일을 해본 것도 아니지만) 1000개 넘게 내 이름이 담긴 기사들을 보내면서도 어떤 것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많다. 혹자는 그렇게 보내는 기사 중에 내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기사 하나만 성공해도 잘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현상 유지'에 급급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만약을 떠올리면서 재미난 상상을 해나간다면, 적어도 전보다 더 나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쓰면서도 사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쫓아가기 바쁠 것 같다) 그럼에도 자꾸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내가 이렇게 적은 대로 조금이라도 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여서 상상을 하거나 만약을 가정하는 일에 약하다. 특히 줄리가 내게 '앞으로 우리 ~~하면, ~~하자' 라는 식의 가정문을 말하면 나는 늘 일단 조건을 충족하고 하자는 식의 찬물끼얹기를 하곤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줄리는 앞으로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가정문을 내게 보내왔다. 이번에도 나는 미소만 띈 채 묵묵부답이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줄리와 함께 만약을 상상해야겠다. 그게 내 삶에도, 내 일에도 더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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