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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추는 왈츠> 우리의 바닥은 어디일까

[2017 KBS 드라마스페셜]그 네 번째

by 브라이스와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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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춤'은 왈츠곡에 맞춰 남녀가 한 쌍이 돼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을 말한다. 혼자 출 수 없는 춤이다. 그런데 단막극의 제목이 '혼자 추는 왈츠'다. 아이러니다. 왈츠는 혼자 출 수 없는데, 혼자 추는 왈츠라니.


드라마는 왈츠로 맺어진 한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왈츠 시험장에서 두 남녀의 첫 만남을 시작해 마지막 장면도 두 사람이 왈츠를 추는 장면으로 끝난다. 제목처럼 혼자 왈츠를 추진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지만 처음과 마지막에 보여지는 왈츠의 의미는 엄연히 달랐다.


사실 '왈츠'는 두 사람의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일 뿐, 안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내용은 2017년을 사는 20대 남녀의 '결핍'과 '바닥'으로 가득 차 있다.


여주인공 김민선(문가영 분)은 목적지향적인 인물이다. 학점을 무사히 받기 위해 처음보는 남자와도 덥석 손을 잡고, 면접장에서 '결혼 계획이 있느냐', '남자친구와의 관계' 등에 대한 면접관의 모욕적인 질문에도 "결혼 계획 없습니다. 아이 생겨도 지우겠습니다" 수준의 경악스러운 답을 내놓기도 한다(물론 이 대답에 대해선 경악스럽고 엉망진창인, 우리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목적으로 점철된 삶에 오히려 민선에게 남는 건, 길어지는 취업 준비 기간과 패배감 뿐이다.


남주인공 구건희(여회현 분)는 자존감이 낮다. 특히 명문대의 지방캠인 자신의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명문대 본캠을 다니는 여자친구 민선에게도 질투감을 느낀다. 지난한 취업 기간을 겪으며 헤어지고 다시 만난 민선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 "민선아, 난 네가 나보다 잘 되는 게 싫었어. 그런 내가 죽여버릴 정도로 싫고, 그런 생각하며 네 얼굴 보는게, 너무 끔찍해서 내가 도망친거야. 난 내가 취업만 되면 우리 옛날처럼 다시 좋아질 수 있을 거라..."


이 고백이 있기 직전 민선도 건희에게 하나의 고백을 한다. "나 너 말고 누구 동정한 적 없어. 행복한 건 싫었어, 재수 없었어. 겉으로 기뻐하는 척 하면서 한 번도 진심인 적 없었어. 그런데 너무 아파. 이게 사랑인 거 맞지? 건희야. 나 너 사랑하는 거 맞잖아, 그렇다고 말해줘." 두 사람 모두 바닥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눈물로 서로의 '바닥'을 확인한 순간, 구원의 벨이 울린다. 앞서 두 사람은 같은 그룹에 신입공채를 지원한 상황이었다. (드라마답게) 둘은 같은 팀에 지원했고, 티오는 두 명인 상황에서 민선과 건희가 함께 합격 연락을 받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으로) 둘 중 한 명만 뽑아야 하니 한날한시에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롤러코스터 같은 전개다. 바닥을 찍은 둘이 함께 고공을 달리다 다시 추락한다. 여기서 둘은 서로의 '바닥의 바닥'을 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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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 면접은 형식적인거고 합격자는 정해져 있을거래. 어떡할래, 면접보러 갈거야?
건희 : 지금 합격자가 너란 얘기야?
민선 : 그럼 너겠어?
건희 : 야 김민선.
민선 : 남자 스물여덟이면 아직 몇 년 남았어. 기회 있을거야.
건희 : 무슨 기회, 너 내 상황 몰라?
민선 : 그럼 내가 너한테 양보라도 해야돼? 넌 그럴 수 있어? 무슨 생각하는데, 말해 보라고.
(묵묵부답인 건희를 보다 먼저 가버리는 민선. 건희가 붙잡으며)
건희 : 야 김민선. 내 말 좀 들어봐
민선 : 내일 면접 보러가, 나도 갈 거야 면접.
건희 : 우리 어차피 결혼할거잖아
민선 : 최선 다할 거야. 그래서 너 떨어트릴 거야.
건희 : 내가 너 책임질게. 네가 취업되든 안 되든 내가 될 때까지,
민선 : 너랑 헤어지면. 그럼 내 인생 뭐가 되는건데.
건희 : 헤어지긴 누가 헤어져. (울 듯 하다 결연한 표정으로) 사랑해 민선아.
민선 : (어이 없다는 듯) 너 진짜 치졸하다.
건희 : 너 진짜 나 없이 살 수 있어?
민선 : 나쁜 새끼. (팔을 뿌리치고 가버린다)


둘은 이렇게 '합격자 한 자리'를 두고 돌이킬 수 없는 바닥을 보고 만다.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공포 영화에 가까울 만큼 섬뜩하다. 긴장감에 컨디션 난조를 보인 민선이 위태롭게 면접장을 향하다 지하철 계단에서 쓰러지고 만다. 의도치 않게 먼 발치서 뒤따라 걷던 건희는 그런 민선을, 그냥 두고 떠난다. 면접 시간이 가까웠다. 민선이 면접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합격은 건희 몫이 된다. 그저 민선을 보지 못했던 거면 되는 것이다. 건희는 8년을 만났던 여자친구를 뒤로 하고, 두 눈 질끈 감고 발을 내딛는다.


면접 시간이 다가오고, 건희는 혼자 면접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되기 5초 전. 문이 열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민선의 목소리다. 건희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도저히 민선을 볼 수 없었다. 민선은 블라우스에 피를 그대로 묻힌 채, 머리 쪽에 상처를 그대로 한 채 면접장에 나타났다. 어떻게 쳤는지 모를 면접을 끝내고 둘은 남남이 돼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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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쯤 지났을까. 민선은 그때 그 면접의 합격한 인사 담당자로, 건희는 다른 그룹의 인사 담당자로 그들의 모교에서 재회한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첫 만남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둘은 다시 밝게 웃으며 만난다. 명함도 교환한다. "언제 한 번 밥먹을까"라는 건희의 제안에는 민선이 웃음 섞인 핀잔으로 거절한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둘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이뤘던 왈츠장이 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두 사람. 각자 화장실로 들어가 안도의, 회한의, 슬픔의, 눈물을 쏟는다.


'혼자 추는 왈츠'는 이렇게 혼자가 돼버린 두 왈츠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제목엔 비유가 담겼지만 내용에선 20대 남녀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현실 상황들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극적인 몇몇 상황들을 빼고 난다면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이 '내 이야기'처럼 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지 않을까. 치졸하기 짝이 없는 내 바닥을 보이는 말들도 누군가는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살아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우리들의 삭막한 삶.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우리의 바닥은 어디일까. 질문을 던지게 한 드라마 '혼자 추는 왈츠'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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