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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이스와 줄리 Dec 31. 2018

활자가 전부 담을 수 없는

문유석 판사가 쓴 '판사유감', 판결문에 모두 담을 수 없던 마음들

요새 리디셀렉트 어플을 통해 책을 이따금씩 읽는다. 지난해 추석에 전자책을 구매했기에 나름 효용을 얻고 싶은 노력이기도 하다. 아직 이 기계가 완전히 익숙하진 않다. 완독한 책이 별로 없는 와중에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판사유감.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각본을 써서 더 유명한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문유석 판사가 과거 법원 내부통신망에 쓴 글을 재정리한 것이었다. 문장은 간결했고, 내용은 재밌었다. 프롤로그에서 문 판사는 언젠가 드라마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을 몇 년 뒤 이뤘으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문 판사는 파산부에서 일하던 시절, 하버드에서 공부하던 시절, 평소에 겪은 판사문화 등을 기록했다. 그동안 내게 판사 이미지는 그저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판사유감 속 문 판사를 비롯한 동료 판사들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특히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 문 판사가 느낀 고뇌가 와닿았다. 징역 1년형을 선고하는 것의 무게, 반복된 범죄를 짓는 범죄자들이 말만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인생들 등이다.


이 중에서 기억나는 건 '희망이 인간을 고문한다'는 소제목이 달린 글이다. 판사부에서 일하던 문 판사는 파산부에서 돈의 늪에 빠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물질적인 부가 전부인 것인양 광고한 세상의 모순을 지적한다. "문제는 희망이 획일화되고 빈곤하다는 데 있다"고 쓴 문장이 통렬하다.

이런 통찰력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책 속에는 기사에서 소개되는 재판 결과, 양형 등을 넘은 이면의 고민들이 나온다. 재판은 수없이 이뤄지는데, 우리는 그걸 형량 숫자와 글자로만 보게 된다. 그런 결정이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 모든 판사가 이로운 판결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하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문 판사는 언론의 생리도 꿰뚫어본다. 야마(제목, 주제)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선을 지적한다(물론 글의 의도는 언론 비판보다는 근거없는 반전이 있는 판결문을 비판했지만). 실제로 우리도 결론 중심의 기사를 쓰곤 한다. 그 뒤에는 어떤 뒷이야기가 담겨 있었는지, 주목하기도 하지만 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피고인에 대한 판결 중 가장 중요한 건 징역 몇 년, 집행유예 여부 등이겠지만 피고인 또는 원고의 사연에 어떤 뒷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사실 그게 기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력이 부족해서,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이야기를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어떤 살인미수 사건에도 잔혹함이 배어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만 했던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재판이 쉽지 않은 이유다.


내 삶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법원의 생리를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가볍게 읽어 넘겼기에 모든 문장을 세세히 기록한 건 아니지만, 편하게 읽어가는 페이지 속에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태도도 가다듬었다.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는 19금 미드의 대사를 빌려 책을 마무리한 그의 에필로그처럼 되고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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