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브라이스와 줄리 Jan 09. 2019

노래로 마음을 전하던 시절

[KBS 드라마스페셜 2018]너와 나의 유효기간

퇴근 후 장례식장 조문이 있어 이를 마친 뒤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참 메말랐구나. 오가면서 음악은 전혀 듣지 않는다. 마음 속에는 회사에 대한 고민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으로 가득차있다. 머잖아 부서이동 인사를 앞둬서인가. 아니면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서인걸까. 메마르디 메마른 내 마음에 단비가 필요했다.


요새 간식으로 무화과베리 맛 생크림파이를 먹는 걸 즐긴다. 그런 달콤한 마음의 간식을 먹고싶었다. 오랜만에 한동안 찾지 않았던 단막극 목록을 뒤졌다. 심각한 사회비판, 스릴러 등도 있지만 단막극의 매력은 단연 로맨틱코미디다.


지난해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스페셜 목록 중 '너와 나의 유효기간'이라는 방송이 시선을 끌었다. 10년 전 풋풋했던 남녀가 오랜만에 재회해 두 사람의 유효기간을 확인하는 시간. 단순하다. 회상과 단편적인 상황, 음악과 연출이 전부인 드라마였다.

때는 2008년. 나는 당시 고3이었고 드라마 기준으로는 08학번들의 이야기다. 내가 09학번이니 그때 상황을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남자는 원더걸스의 텔미, 소녀시대의 노래 등을 MP3에 담은 친구였고, 여자는 유재하의 지난날,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등 다소 촌시런(?) 취향의 MP3 사용자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도서관에서 시작된다. 같은 기종의 MP3를 바꿔가져가면서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보게 된 것. 생경한 음악세계에서 얼굴도 보지 않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이후 두 사람의 장면은 차곡차곡 쌓인다. 합창동아리에서의 추억, 번번이 고백을 하고 싶어하나 입을 못 떼는 지질한 남자의 모습. 이어폰을 나눠 같은 노래를 듣는(추억과 사랑이 있는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별 거 아닌 상황들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는 이유는 뭘까. 물론 나는 대학시절 그런 일을 해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학교 졸업 후 지금의 아내를 만나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어폰을 나눠끼고 음악을 듣고, 지질하게 고백 못한 내 마음을 알아챈 아내가 먼저 손을 내어줬다던가.. 뭐 그런)

엇갈린 남녀는 결국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확인하지 못한 채 각자의 길로 떠난다. 다만 남자는 여자가 잠시 해외로 떠나는 날, 여자의 취향으로 채운 MP3를 선물한다. 그때도 남자는 시원히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고맙게도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음악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나중에 재회한 자리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그때 너가 고백했었노라고 말했으니.


10년 뒤 우연히 재회한 둘은 다행히도(!) 서로를 향한 마음의 유효기간이 다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에둘러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상대의 꿈을 응원하고, 각자가 결혼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서 말이다.


숨겨둔 극적 장치가 참 뻔하고, 온갖 클리셰로 채워진 드라마였다. 그럼에도 어떤 장면에선 가슴 졸여보고, 어떤 장면에선 만연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들의 추억이 남의 추억이 아닌 나의 추억이였기 때문이다. 야밤에 혼자 무화과베리를(실제로도 까먹었다) 먹은 기분이랄까.


이제는 노래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 있을까. 적어도 MP3를 쓰던 시절에는 그랬던 것 같다. 싸이월드로 마음을 녹여보고, MP3 노래 플레이리스트로 감성을 쏟아내던 때가 있었다. 이 드라마를 마주한 2019년 어느덧 나도 서른이 돼버렸다. 스물을 추억하는 드라마 속 서른의 얼굴이 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괜스레 그때의 공기, 햇빛, 바람, 촉감들이 그립다. 오랜만에 예전에 즐겨들었던 노래를 꺼내보니 더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활자가 전부 담을 수 없는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